2030 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활동 지원을 위해 프랑스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파리 이시레몰리노의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장에 입장하며 정의선 현대차 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완 | 산업팀장
국내 4대 그룹 총수들이 자리를 비우고 일제히 프랑스로 향했다. 이들의 출장 목적은 부산 세계엑스포 유치 지원. 4대 그룹 총수 모두가 한 목적을 향해 한곳에 모이는 건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과거에도 국가적인 주요 행사 유치를 위해 재벌 총수가 발 벗고 나선 일은 있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때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2년 여수엑스포 때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뛰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4대 그룹 총수들이 일사불란하게 다 같이 출장을 떠난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과거 재벌 총수가 개별적으로 뛰던 그때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사면이다. 2009년 1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이건희 회장 한명만 ‘원포인트’ 사면을 했다. 정몽구 회장도 비자금 관련 사건 재판을 받는 와중에 여수엑스포 유치 활동을 했다. 2007년에 여수엑스포 유치가 결정된 뒤 정 회장은 2008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재벌 총수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가 뭘까. 기업들에 물어보니 “간접적으로 보탬이 된다”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고, 잠시 생각한 뒤 “도움될 게 뭐가 있냐”고 잘라낸 이도 있었다. “엑스포 유치 활동을 하다 보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발굴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다”는 설명도 있었지만, 전화기 너머 기업 고위관계자 대부분은 ‘국익’ 외에는 뾰족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국익은 커질지도 모르겠다. 올림픽·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행사로 불리는 엑스포를 유치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61조원 규모 경제효과와 50만명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장밋빛 설명도 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최신 기술은 이제 ‘미국 소비자 가전 박람회’(CES)나 애플의 세계개발자회의 등을 통해 발표된다는 건 접어두고, 2012년 여수엑스포가 끝난 뒤 입장 수익 등을 제하고 남은 빚이 3400억원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잊힌 지 오래다.
삼성전자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외벽에 마련된 갤럭시 옥외 광고에 ‘2030 부산 엑스포’ 로고를 포함하고 박람회 유치 활동을 알리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재벌 총수들이 총출동한 이유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도 있다. 지난해 5월31일, 며칠 전 대통령선거에서 신승을 거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부산을 찾았다. 이날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선 윤 대통령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원 민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윤 대통령은 이날 부산에서 “2030 부산 세계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유치될 수 있도록 정부의 역량을 총집결할 것”이라며 “저도 직접 최선을 다해 챙기겠다”고 했다. 특수통 검사 출신 대통령이 앞으로 재계를 어떻게 단속할지 초미의 관심을 끌던 때였다.
이후 대한상의는 각 기업에 부산엑스포 지지표를 받아오라고 전세계를 지역별로 나눠 할당했다. 삼성전자, 현대차, 에스케이(SK), 엘지(LG), 롯데, 포스코, 한화, 지에스(GS), 현대중공업, 신세계, 씨제이(CJ) 등 11개사(그룹)가 동참했다. 이들 기업은 지난해 특별회비 311억원을 분담해 내기도 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검사들이 수사를 어떻게 하는지 아는데, 누가 ‘나는 안 해’라고 빠질 수 있을까”라고 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공포”라는 말도 입에 올렸다.
윤 대통령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에 함께하기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엘지그룹 회장 등이 파리로 향하고 있을 때,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을 찾고 있었다. 블링컨 장관은 19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대화 복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기업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것 같지만, 실상 이들은 세밀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뿐이었다.
경제에 진짜 공포는 무엇일까. 반도체 장비 중국 반입 규제와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기업의 생존과 밀접한 대화가 다른 나라에서 치열하게 오가는 사이, 전용기에 오른 4대 그룹 총수들의 눈은 파리로만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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