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각계 원로 인사들과 언론단체 회원들이 1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방송>(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티브이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을 규탄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공영방송 <케이비에스>(KBS)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공영방송이 공정성을 잃고 정권의 입맛에 맞춘 방송을 했습니다. 공정성을 잃은 방송을 국민은 거부할 수 있고, 따라서 수신료 납부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략) 티브이(TV) 수신료 분리의 필요성에 따라 저는 오늘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하게 됐습니다.”
누가 한 말일까? 당연히 국민의힘 의원 아니냐고? 뜻밖에도 이 말의 주인공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그가 2017년 4월 티브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위한 방송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면서 낸 보도자료에 있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의 수신료 분리 징수 속도전에 민주당이 ‘공영방송 장악’ 음모라며 반발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 의원이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2017년 4월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쫓겨나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던 때였다. 물론 한국방송은 여전히 박근혜 정부 쪽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박 의원은 당시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현재 케이비에스의 경우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하느냐에 대해 국민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방송법 개정안은) 국민에게 수신료 지불 선택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신료 납부 선택권’, 왠지 귀에 익지 않은가.
“그동안 수신료 통합 징수를 둘러싸고 소비자 선택권 및 수신료 납부 거부권 행사가 제한된다는 지적 등이 꾸준히 제기됐다.”(올해 3월, 대통령실의 국민제안 누리집 찬반투표 제안 글)
“케이비에스가 공정하게 제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만 수신료를 내게 하는 ‘수신료 자율납부’를 포함해,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지난해 7월, 국민의힘 미디어특별위원회)
박 의원을 콕 집어 비판할 생각은 없다. 티브이 수신료에 관한 한 ‘내로남불’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거의 없을 테니. 그동안 여야 정치권이 공수를 교대해가며 벌여온 ‘수신료 정쟁’의 역사를 돌아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포문을 연 것은 보수정당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수신료 분리 징수 법안을 추진했다. 총선을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 몇년 뒤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자 한나라당은 오히려 수신료 인상 카드를 빼 들었다. 대선 캠프 출신 김인규 한국방송 사장이 수신료 인상 필요성을 제기하자 이에 화답한 것이다. 수신료 인상은 박근혜 정부 때도 한 차례 시도됐다. 반면 노무현 정부 때 수신료 인상에 긍정적이었던 민주당은 10년간의 보수 정부 시절에는 거꾸로 수신료 분리 징수 입법을 여러 차례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한번 공수 교대가 이뤄졌다.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은 정권의 방송 장악을 막아야 한다며, 당 차원에서 ‘케이비에스 수신료 분리 징수 특별위원회’를 꾸렸다.
현재 진행 중인 수신료 공방은 그 양상이 이전과 좀 다르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국민의힘이 야당 시절에 이어 여전히 공격권을 쥐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이 반발하자 국민의힘은 이렇게 비판했다. “민주당은 정녕 2014년과 2017년에 각각 노웅래 의원, 박주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방송법을 잊었나. 개정 사유와 내용 모두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것과 똑같다. 도대체 왜 반대하는 것인가?”(장동혁 원내대변인 논평)
국회 입법 논의로 ‘수신료 정쟁’이 이뤄졌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대통령실이 전면에 나선 것도 이례적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골적인 사퇴 압력에도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이 버티는 바람에 아직 방송을 틀어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친여 방송’이라는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자 조바심이 난 것이다. “(집권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공영방송 이사를) 하나도 못 먹고 있다”(지난해 12월,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는 말에 그들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한 위원장이 순순히 물러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공영방송을 ‘먹었다면’, 수신료 분리 징수 압박은 없었을 것이다.
‘수신료 정쟁’ 20년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권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방송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할 때는 ‘수신료 인상’이라는 당근을, 남의 편이라고 여길 땐 ‘분리 징수’라는 채찍을 내밀었다. 그 과정에 저널리즘 원칙이나 방송의 독립성·공공성 같은 가치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물론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시민들이 수신료 거부 운동을 벌이는 것은 저항권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땡전 뉴스’가 횡행하던 전두환 정권 시절, 들불처럼 번진 시청료 거부 투쟁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정치권이 수신료를 방송 길들이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략적 접근에서 벗어나야 공영방송이 바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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