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그레셤의 법칙은 ‘시장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사한 현상이 은행업에서도 발생한다. 은행은 우량고객(양화)에겐 대출을 해주어 고객으로 삼지만 비우량고객(악화)의 대출은 거절하여 시장으로 내보낸다. 이러한 대출과 대출 거절의 과정이 펼쳐지면서 1, 2금융권 등 금융권의 ‘계층화’가 형성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월4일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청년 첫출발, 소상공인 새출발과 기본금융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헌 | 전 금융감독원장
지난 1월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은행은 국방보다 중요한 공공재적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2월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은행의 공공재적 성격을 재차 강조하면서 은행의 보너스 잔치를 나무랐다.
은행법은 제1조에서 은행의 목적을 “자금중개기능의 효율성을 높이며 예금자를 보호하고 신용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금융시장의 안정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 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은행은 강한 상업성과 이윤추구 모습을 드러내는 게 현실이다. 비근한 예로 디지털 전환기에 신속한 영업점 폐쇄, 사모펀드 부실 판매, 급격한 대출금리 인상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아픈 문제는 비우량으로 판단한 고객의 대출신청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는 비록 잘 드러나지 않지만 광범위한 문제이며, 신용할당(credit rationing)으로도 불린다.
은행은 대출 때 고객에게 통상 담보 또는 높은 신용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담보가 부실하거나 신용도가 낮다고 판단하면 높은 금리를 요구하거나 대출신청을 거절한다. 은행 입장에서 당연한 일인지 모르나 거절당한 고객은 비우량으로 낙인찍혀 상황이 어려워진다. 제2금융권으로 가거나, 대출을 포기하거나, 프로젝트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은행이 비우량으로 판단한 고객의 대출신청을 거절하면 잠재적 손실을 제거하게 되므로 대출 포트폴리오 이익에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은행의 비우량 판단이 대체로 은행이 보유한 고객정보를 근거로 하는데, 이러한 고객정보는 사실 고객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대출 소요자금은 은행의 것이나 고객정보는 고객의 것인데, 은행이 이를 토대로 대출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이익 창출에 이용하는 것이다. 은행이 고객을 보상해도 모자랄 판에 그의 대출신청을 거절하여 피해를 주는 셈이다. 이런 대출 거절에 따라 금융시장 전체적으로 우량고객은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게 되지만 비우량 고객은 나쁜 조건을 감수하거나 대출을 거절당해 대출시장에 양극화가 초래된다.
물론 고객의 담보 부족이나 낮은 신용도가 은행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은행이 대출 관련 의사결정을 할 때 사용하는 고객정보가 본래 고객에게서 나왔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고객 관련 정보를 이용하고서 정작 고객은 버리는 은행의 행태는 ‘이익은 내가 취하고, 비용은 사회가 부담하라’는 도덕적 해이에 비유될 수 있다.
잘 알려진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은 시장의 관점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사한 현상이 은행업에서도 발생한다. 은행은 우량고객(양화)에겐 대출을 해주어 고객으로 삼지만 비우량고객(악화)의 대출은 거절하여 시장으로 내보낸다. 이러한 대출과 대출 거절의 과정이 펼쳐지면서 1, 2금융권 등 금융권의 ‘계층화’가 형성된다. 그 결과 자금이 여유로운 우량고객은 낮은 금리 조달이 가능하지만, 자금이 늘 아쉬운 비우량고객은 조달이 어려운 ‘금융의 양극화’가 발생한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청년 첫출발, 소상공인 새출발과 기본금융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021년 8월 ‘기본소득 공청회’에서 소개한 기본대출 정책을 다시 꺼냈다. 모든 국민이 은행권 수준의 저금리로 일정 금액(1천만원)을 만기(20년)까지 대출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필자는 이러한 기본대출이 금융 양극화 해소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 이를 살피기 위해 은행이 통상 기업고객에게 제공하는 상업성 신용라인(line of credit)을 고려하자. 신용라인은 은행이 고객에게 일정한 한도 안에서 일정한 금리로 일정 기간 동안 대출을 약속하는 장치다. 이자는 실제 차입금에 대해 지급하고 한도까지 언제든 빌릴 수 있으며 정해진 만기 안에 갚으면 다시 빌릴 수 있다. 개인에게 제공되는 마이너스 통장과 유사하다. 다만 은행은 상업성 신용라인 허용 때 신용도 등 적격요건 충족을 요구하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제공을 제한한다. 즉 모든 국민에게 제공되지는 않으므로 공공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량고객에게만 제공되는 일종의 특혜 서비스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은행이 신용라인 개설 때 적격요건을 면제하고 모든 국민에게 대출을 보장한다면, 은행의 서비스는 국민의 권리로 바뀌게 된다. 이제 만기를 20년으로 특정하면 이 대표의 기본대출이 된다. 결국 기본대출은 신용라인의 변형이며 모든 국민에게 제공되므로 윤 대통령이 언급한 공공재가 되는 것이다.
기본대출의 실효성 제고를 위해 두가지 보완장치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첫째는 재원 확보다. 1천만원을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대출할 경우, 일부가 신청하지 않더라도 전체 규모가 크고 신용위험 대비도 필요하다. 한편 신용위험은 일정 부분까지는 은행이 부담하고 이를 초과하는 부분을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게다가 도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경우 출발 시점의 자금소요가 줄고 또 전체 규모가 일정 수준에 달하면 더는 증가하지 않을 것이므로 도입 직후 수년간의 재원 확보가 문제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 기본대출 재원으로 거론하는 횡재세는 은행의 고객정보 이용의 대가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도덕적 해이 완화다. 기본대출을 공공재로 보면 차입자가 상환의무 소홀이라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어 지속가능성이 우려된다. 따라서 누구나 처음엔 1천만원까지 저금리로 빌릴 수 있되, 이를 갚으면 일정한 심사를 거쳐 다시 빌릴 수 있게 하면 도덕적 해이 완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기를 특정하는 대신 상환을 조건으로 차환옵션을 부여하거나 한도를 상향하는 방식도 같은 효과가 기대된다. 부수적으로 이 제도는 신용경력이 일천한 국민이 신용데이터를 집적하여 제도 금융권에 진입하도록 유인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한편 은행은 이 제도를 차세대 고객 육성방안으로 이용할 수 있다.
기본대출이 금융 양극화 속에 취약계층의 자금 조달과 금융서비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기본적 금융수단으로 자리매김해 선진 한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금융 중개 역할 제공의 물꼬를 틀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