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22 _노동조합2
샤츠슈나이더는 “싸움의 결과를 결정하는 일은 대개 구경꾼의 몫”이라는 구경꾼 비유로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 양상을 설명했다. 우월한 자원과 수단을 가진 강자와 맞서는 약자는 구경꾼들이 호응하고 편들어주면 승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갈등을 논리와 정책대안으로 ‘사회화 혹은 정치화’하는 게 약자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문제는 양대 노총이 정교한 돌팔매를 던지고 구경꾼들의 호응을 불러 모을 의지와 역량이 있느냐다.
윤석열 정부의 퇴행 정도가 심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다양한 부문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노사정 등 우리 사회 주요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각종 현안과 시대적 과제들이 역주행하거나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위기로 인한 노동빈곤층 증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에 따른 노사정 대응 등 시대적 과제들은 정부 혼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데다, 방치될 경우 우리 사회의 미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노조 때리기’로 인한 적대적 노정관계 속에서 사회적 대화의 실종은 장기화할 조짐이다. 민주노총은 일찍이 7월 총파업을 예고했고, 한국노총도 최근 정권심판 투쟁을 선언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데는 윤석열 대통령의 왜곡된 노조관이 큰 요인으로 보인다. 여당의 눈치보기와 무능, 관료들의 무소신 등은 또 다른 요인이다.
그렇다면, 현장 노조 간부들은 기후위기 대응 등 작금의 시대적 과제와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대응을 모색하고 있을까?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런 물음을 갖고 최근 한 산별노조 간부들을 두루 만났는데, 대다수가 총연맹 방침대로 지금은 오직 투쟁이라는 생각을 피력했다고 한다. 기후위기 대응 등 과제와 관련해선 “정보도 없고, 정책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노사관계의 중재자여야 할 정부가 노조와 대화를 거부하고 사실상 노조탄압 정책으로 일관하는 판에 이들이 투쟁노선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찬찬히 짚어볼 점은 ‘어떤 투쟁인가’란 물음이다. 이 점에서 박 선임연구위원은 “투쟁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를 벌이는 고비용, 고에너지의 ‘아스팔트 투쟁’만이 투쟁의 전부가 아니란 얘기다. 그가 강조하는 또다른 투쟁의 핵심은 정부가 노조때리기를 지속할 수 없도록 여론을 노조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 수단은 정책과 교육이다. 시민을 설득할 논리와 각종 노동 및 사회현안에 대한 대안 제시가 정책이라면, 조합원들과 이를 공유하는 집단학습이 교육이다. 내년 4월 총선이나 윤석열 정부 이후 노동의제를 주도할 정책역량을 갖추려는 노력도 노조가 힘을 쏟아야 할 투쟁이라는 얘기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주요 정책담당자들도 같은 맥락에서 고민과 처방을 말한다. 정문주 한국노총 사무처장은 “(지금은) 정권의 탄압과 복합위기로 인해 노조에는 어느 때보다 시련의 시간”이라면서 “정부가 해도 해도 너무하니 투쟁일변도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지만, (정책역량 강화와 조합원 교육에) 무진 애를 쓴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접근을 달리한다. 이정희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솔직히 신자유주의 한국사회를 바꿀 (민주노총 차원의) 정책 비전이 없지만, 현재 국민의 지지를 끌어올리고 노동의 영향력을 높일 강력한 무기는 노동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면서 “향후 민주노총 중심의 진보연합정당을 세우는 데 힘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금융노조에서 오랫동안 정책을 맡아온 김경수 정책실장은 총연맹인 민주노총과 같은 투쟁 대열에 서면서도 약간 결이 다른 처방을 함께 내비쳤다. 그는 “한국노총 소속 금융노조와 함께 세운 ‘양대 노총 금융노동자 공동투쟁본부’를 통해 오는 7월 대규모 집회를 여는 등 투쟁의 강도를 높이면서도 금융당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정책 대응력을 갖추는 준비도 함께한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부가 탄압을 노골화할수록 노동운동은 정교한 돌팔매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교한 돌팔매란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시민의 지지를 이끌 논리와 정책 대안이다. 그는 “노동운동은 싸움엔 능하지만, 구경꾼을 잘 못 만든다”면서, “노동운동이 우호적 지지를 이끌 구경꾼을 만들기 위해선 아스팔트 투쟁만큼이나 정책역량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말한 ‘구경꾼’은 정치학의 고전인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차용한 용어다. 저자인 샤츠슈나이더는 이 책에서 “싸움의 결과를 결정하는 일은 대개 구경꾼의 몫”이라는 구경꾼 비유로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 양상을 설명했다. 우월한 자원과 수단을 가진 강자와 맞서는 약자도 구경꾼들이 호응하고 편들어주면 승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갈등을 논리와 정책대안으로 ‘사회화 혹은 정치화’하는 게 약자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문제는 양대 노총이 정교한 돌팔매를 던지고 구경꾼들의 호응을 불러 모을 의지와 역량이 있느냐다. 특히 “인적·물적 자원과 네트워크 등 일종의 정책 인프라와 이를 적절히 동원해 빚어내는 정책형성 능력,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정책을 현실에서 구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힘인 정책역량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가 최근 확인한 결과, 조합원 121만명(2021년 말 기준)인 민주노총 정책실 현 인원은 실장 포함 9명에 불과했다. 예산도 8400만원(2023년 기준)이 전부였다. 산하 싱크탱크인 민주노동연구원이 그나마 최근 인력과 예산을 보강해 약간 나아졌지만, 민주노총의 빈약한 정책역량은 오랜 답보상태다. 조합원 123만명의 한국노총은 정책본부장 2명 포함 11명에 예산은 3억5천만원(훈련사업비 1억2천만원 포함)으로 민주노총보다 조금 낫지만, 역시 제1노총 지위에 걸맞은 수준이라 보기는 어렵다. 비교적 꾸준히 활동해온 산하 싱크탱크인 한국노총 중앙연구원도 올해 들어 정부보조금이 끊기면서 연구프로젝트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별노조의 정책역량도 빈약하긴 마찬가지인데, 다양한 사업장에 수만명 조합원이 소속돼 있지만 정책 담당자는 기껏 1~2명이다.
상황이 이러니 실제 만들어내는 정책도 거의 없는 정도이고, 정책 입안 단계에서의 영향력 행사도 수동적 대응에 그친다. 그나마 각종 정부위원회(한국노총 60~70여곳, 민주노총 40~50여곳)에 참가해 정책 개입을 벌여왔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서 중앙 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완전히 막힌 가운데, 단순 협의 수준인 이 정책참여 채널마저도 속속 끊기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전반을 심의하는 건강보험 재정운영위원회에 양대 노총 모두 회계장부 미제출을 이유로 참여를 거부당한 게 대표적이다. 윤 정부는 그 자리에 독립노조 소속 인사들을 채웠다.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탄압과 배제, 고립의 시기일수록 ‘또다른 투쟁’ 콘텐츠인 정책 전문성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각종 노동현안과 시민의 삶의 질을 드높일 정책 대안을 양적·질적으로 강화해 정책행위자로서 노동조합의 역할을 드높이는 것만이 ‘정교한 돌팔매’, ‘구경꾼들의 호응’을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책인력의 양적 확대와 전문성을 키우는 노력 등 정책인프라 개선 △정책소통을 위한 노총 및 노조 내부의 소통체계 및 외부인력 활용을 위한 네트워크 강화 △정부 내 각종 위원회의 적극 참여와 개입 등을 얘기해 왔다.
정당 및 시민사회와의 정책 연대를 통해 정책 주도성을 지속해서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창근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그 출발점은 “다시 밑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심정의 대대적인 내부 혁신과 성찰”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실제 첫발을 떼기 위해서는 정책역량 강화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노동운동 리더십의 뚜렷한 인식 전환이 필수다. 퇴행의 시기, 아스팔트 투쟁을 준비하는 노동운동 수뇌부들에게 구경꾼과 돌팔매의 비유는 얼마나 중요하게 가 닿을까.
※참고문헌: <노동조합의 정책역량에 관한 연구>(박명준 외, 한국노동연구원)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회정책학 박사.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를 살피는 이 연재 칼럼에 힘을 쏟는 것은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김동명 위원장 등 한국노총 간부들이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 방식을 규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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