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김정표씨가 지난 1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린 제36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항쟁을 기억하는 편지를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올해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주관 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후원한 진보단체 행사 광고에 ‘윤석열 정권 퇴진’ 문구가 실렸다는 이유다. 사업회는 사전에 이를 몰랐고, 후원 철회를 했음에도 행정안전부는 불참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12일부터 해당 행사 후원뿐 아니라 사업 전반에 대한 특별감사도 벌인다.
지난해 11월에는 ‘바이든-날리면’ 보도 여파로 대통령실이 <문화방송>(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했고, 지난 4월에는 한달 전 윤 대통령 방일 환영행사를 중계하면서 ‘일장기를 향해 경례하는 윤 대통령’이라고 잘못 말한 것을 이유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해당 기자의 해외연수 선정을 돌연 취소했다. 해당 실수는 생방송 도중 빚어진 일로, 당일 중계에서 곧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음에도 문제 삼은 것이다.
각 기관은 다르지만, 모두 윤석열 정부 아래 벌어지고 있는 ‘좁쌀 뒤끝’이다. 이는 위임받은 국민의 권한과 자산을 정권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행사도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정권에 거슬리는 행동에는 정권이 베푼 혜택(?)을 걷어들이는 게 당연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또 다른 특징은 속내가 여실히 보이는데, 남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것이다. <한국방송>(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압박하면서 ‘국민들이 원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수신료 분리징수’를 택할 수 있다. 다만, 공영방송 하나를 없애겠다는 게 아니라면 분리징수 이후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전혀 없다. 한국방송 재원 중 수신료 비중은 45%에 이른다. 대통령실이 분리징수 권고 근거로 제시한 설문조사는 대통령실 누리집 ‘국민참여 토론’ 코너에 ‘티브이(TV) 수신료와 전기요금 통합 징수 개선, 국민 의견을 듣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한달간 무작위 수렴한 결과다. 징수방식 개선 추천(찬성)이 96%였다는 것이다. 민간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면 무능으로 찍힌다.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하더라도 분리징수 찬성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먹구구와 얼렁뚱땅으로 정책을 결정해도 되는가. 일부 민간단체의 지원금 유용을 들어 전체 시민단체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우며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속내가 뻔히 보인다.
하부 권력기관에선 과잉이 만성화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 요청서 자료 유출을 문제 삼아 문화방송 본사와 국회의원실 압수수색에 나서는 경찰, 권익위원장에 대한 무리한 감사를 제지하는 감사위원회 결정도 불복하는 감사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시대착오와 무능이 결합한 결과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번, 광복절 기념사에서 33번,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21번 ‘자유’를 언급했다. 그러나 이 연설문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자유’가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자유’, ‘자유’만 무한반복할 뿐이다. 표현의 자유를 이토록 옥죄는 정권이 ‘자유’, ‘자유’라 하니 어이가 없다. 이 ‘자유’를 ‘북한 괴뢰’에 맞서는 1970년대의 ‘자유 대한’ 개념으로 바라보면, 이 정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해석 가능해진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 70년대 말 권위주의 시대에서 사고의 성장이 멈춰진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당시 고성장으로 ‘보수는 유능’이란 신앙이 한동안 떠돌았다. 그건 후진국에서 노동탄압, 정경유착을 통한 ‘몽둥이 유능’이었다. 아이들 몽둥이찜질해 성적 올리는 말죽거리 시대를 챗지피티(GPT) 시대에 적용할 순 없다. 과거 사고에 머물러 있는데다 검찰 습성에 익숙한 윤석열 정부는 일사불란 권위주의 리더십을 추구하는데, 권위주의 수단은 없으니 무리수와 무능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장세동·허문도’가 있어야 하는데, ‘땡윤 뉴스’가 있어야 하는데, ‘이근안’이 있어야 하는데, ‘유정회’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시대에 이를 구현하려 한다면 시대착오이자, 비극이다.
윤석열 정부를 보수정부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수는 이런 게 아니다. 관용과 도덕, 품격, 합리성에 기반해야 진정한 보수다. 대의를 위해 이익을 버리기도 하는 것이 보수인데, 사익을 위해 가치를 훼손하고 공공자원을 동원한다. 해방 이후 한국 보수가 줄곧 보여준 행태이긴 하다. 한국 보수에는 자기희생의 전통이 없다. 윤 대통령은 ‘결단’이란 말을 자주 쓴다. 대부분 “묵과하지 않겠다” 등 상대 진영을 박살낼 때 쓴다. ‘결단’이란 자신을 희생할 때 울림이 있다. 지금 진행되는 건 공정도 상식도 아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지배 엘리트층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이다. 공직자로서 고민과 성찰의 일상이 바탕 되지 않으면, 결단도 성과도 업적도 없다. 부질없는 당부일지라도, 윤석열 정부가 제대로 된 보수정부의 길을 걷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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