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27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엘지필립스 엘시디(LCD) 파주공장 준공식을 마친 뒤 이 회사 김우식 부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관람하고 있다. 이날 준공식에서 노 대통령은 창조와 도전이 역사를 만든다며 공장 준공을 축하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3월11일(화) 9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외국인 투자 발목 잡는 사례를 발표했다. 엘지(LG)필립스의 수도권 투자 건이 포함돼 있었다. 7세대 엘시디(LCD)를 제작하는 이 회사는 당시 대만, 중국보다 기술이 3~5년 앞섰다. 경기도 파주에 2007년까지 10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반제품을 생산해 중국 난징에서 조립할 계획인데, 물류비 절감을 위해 인천공항 부근 입지를 희망했다.
약 1천명의 고급 인력 일자리를 만들어낼 공장을 불허하면 중국으로 갈 가능성이 커 특별히 예외를 인정해주자고 고건 총리,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이 주장했다. 한명숙 환경부 장관은 “이런 식으로 예외를 인정하면 정책의 신뢰성이 문제가 된다. 국내기업은 역차별을 받는 셈이므로 곤란하다”고 반론을 폈다. 수도권 과밀억제 주무부처인 건교부 장관은 수도권 진입을 막는 것보다는 지방에 줄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을 살리고 수도권 집중을 막아야 하는 것이 대전제이지만 인천공항이 있는 이상 그 주변에 공장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환경부, 건교부에서 미리 입지 조사를 해서 자료를 축적하고 국토관리의 새 틀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2006년 4월27일 엘지필립스 엘시디(LCD) 파주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터치 버튼을 누른 뒤 박수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준공식에서 창조와 도전이 역사를 만든다며 공장 준공을 축하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3월27일(목) 12시 손학규 경기지사가 찾아와 점심을 함께했다. 당시 3백인 이상 기업에 수도권 공장 규제가 적용됐는데, ‘첨단 24개 업종 또는 외국인 지분 51% 이상’인 적용 예외 대상에 2002년 초 엘시디가 추가됐다. 외국인 지분 기준도 51%에서 50%로 낮춰 톰슨, 코닝 등도 예외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03년 말 예외 조항의 일몰 시한이 다가오는데 엘지필립스의 파주공장 100억달러 투자 계획은 워낙 매력이 커서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예외를 인정해주는 안을 의결했다. 단 2003년 말까지 산업단지를 완성해야 하는데, 손 지사는 이 기간을 좀 연장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회사는 투자선을 중국으로 돌릴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한국의 지방 투자가 상책이요, 수도권 투자가 중책이라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하책인데, 상책을 목표로 하다가 자칫 하책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겠다’고 대답했다.
2003년 4월3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관계자 초청 만찬에서 공로명 유치위원장으로부터 배지를 받는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사료관 제공
4월3일(목) 저녁 6시 청와대 백악실에서 2010년 동계올림픽 한국 유치위원회 초청 만찬이 있었다. 공로명 위원장(전 러시아·일본대사, 외교부 장관), 이연택 체육회장, 김진선 강원지사, 김운용, 박용성, 이건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 나와 권오규 정책수석이 참석했다. 이연택 회장은 내년 올림픽에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소수 딸 것으로 기대한다며, 선수들 보상이 적어서 사기가 낮다고 덧붙였다. 월드컵 축구팀 이야기가 나오자 김운용 위원이 불쾌한 듯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2002년 월드컵 때 축구경기장을 전국에 10군데나 짓는 것을 반대했고 사마란치도 반대했으나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밀어붙였다며 비판했다. 김 위원은 생활체육을 강조하면서 이연택 회장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권오규 수석은 유치위원회가 IOC 총회가 열릴 체코를 직접 방문하라고 권유하면서 독일보다 체코의 경제발전 모델이 북한에 더 의미 있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이 권 수석을 칭찬했다. “정책실장은 그렇다 치고 정책수석은 모르는 게 없어요.” 그 말을 받아서 이건희 회장이 “우리가 스카우트하려 했는데 선수를 뺏겼습니다”라고 맞장구쳤다.
2003년 4월3일 노무현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동계올림픽 유치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하며 개최지 결정 3개월을 앞둔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노 대통령은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여러분들과 허심탄회한 자리를 갖게 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오늘 이 자리가 국민에게 유치 의지를 알리고 국민적 분위기를 띄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 노무현 대통령, 국제올림픽위윈회(IOC) 김운용 위원, 이건희 위원. 노무현사료관 제공
이건희 회장은 식사 도중 느릿느릿한 말투로 노 대통령에게 두 가지를 권고했다. “하루에 1시간 반 이상 운동하셔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아침에 30분간 스트레칭을 한다고 대답했다. 이 회장이 노 대통령에게 물었다. “아침에 몇시에 일어나십니까?” “5시에 일어납니다.” “5시에 기상하면 몇시간 주무십니까?” “11시쯤 취침해서 잠은 잘 자는 편이며, 점심 먹고 30분 정도 낮잠을 잡니다.”
이 회장의 다음 건의가 이어졌다. “신문과 잡지를 일절 읽지 마십시오. 스트레스만 받을 뿐입니다. 그 대신 좋은 책을 남더러 읽으라 하고, 요약 보고를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 우화에 나오는, 세상의 현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책을 읽고 공부해서 한두마디로 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어느 게으른 왕을 연상시키는 발언이었다. 말하자면 황제적 공부 방법일 텐데, 그보다는 노 대통령처럼 본인이 직접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이 회장은 나와는 냉랭하게 형식적으로 악수하더니 내 뒤에 서 있던 권오규 수석과 악수하면서는 “고명한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다음에 꼭 식사를 모실 테니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놀랄 만큼 정중히 인사했다. 이 회장은 권 수석보다 열살 정도 연상이니 과공비례라는 느낌을 받았다.
5월14일(수) 오후 4시 삼성전자 최아무개와 다른 한 명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 기흥공장 증설 문제를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5월17일(토) 10시30분께 균형발전위원회 기조실장인 이정호 교수(나중에 시민사회수석)와 균형발전위 운영계획을 논의하면서 삼성전자의 공장 증설 요청 건을 의논했다. 위원회에서는 일단 보류키로 했다고 한다. 지방 발전계획을 발표해 지방에 희망을 준 다음 수도권 공장 증설을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는 2단계 접근이었다. 산자부는 애매모호, 이중적이었다.
5월30일(금) 아침 7시 관저 조찬 모임에 참석했다. 주제는 금융정책 기조와 경제 챙기기. 삼성전자와 쌍용자동차의 수도권 공장 증설 건이 안건으로 올랐다. 삼성전자는 50% 증설을, 쌍용차는 100% 증설을 요구했다. 노 대통령이 “이거 허가 안 해주면 중국 간다는데 사실입니까?”하고 물으니 권오규 수석이 “틀림없이 갑니다”라고 두 번 반복해서 답했다. 노 대통령이 권 수석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 양반이!” 라고 중얼거렸다.
정책실 이병완 비서관(나중에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실장)이 김영삼(YS) 대통령 실화를 소개했다. 남해안 치어 방생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려는데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연설 원고가 날아가 난감해졌단다. 원래 원고는 “오늘 우리는 바다에 치어를 방생했습니다”였는데 YS는 이렇게 연설했다. “오늘 우리는 바다에 생선을 심었습니다.” 재미있는 실화라 모두 웃었다.
6월11일(수) 저녁 퇴근 때 차 속에서 전화가 불이 났다. <동아일보>,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삼성 기흥공장 증설을 허용키로 했다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 발 기사가 나는데, 사실 확인차 <매일경제> 김상협 기자와 <중앙일보> 등에서 무수히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받다가 나중에는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알아봐도 누구 말인지 확인할 수 없었고, 결국 사실무근 보도가 됐다.
6월27일(금) 오후 5:30~9:30 하반기 경제정책 기조 회의가 있었다.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장관들, 청와대에서는 나와 권오규 수석, 조윤제 보좌관이 참석했다. 국채 발행에 김진표 부총리가 찬성하고 박봉흠 예산처 장관은 반대했다. 삼성, 쌍용차 수도권 공장 증설이 안건으로 올라왔기에 성경륭 균형발전위원장, 한명숙 환경부 장관과 내가 반대했다. 권오규 수석이 “그러면 내용은 증설로 픽스하고(정하고) 시기만 미루자”고 하기에 내가 다시 반대했다. “픽스는 무슨 픽스냐,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 다음에 본격 검토하자”고 보류시켰다. 삼성 대 균형발전의 싸움은 치열했다. 참여정부는 지방에 애정을 가졌고, 균형발전을 국정목표로 내건 첫 정부인데 첫걸음부터 행마가 쉽지 않았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