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한 공동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든든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공동체의 지속적인 신뢰가 있을 때만 작동할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신뢰는 과학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과 조직, 이를 운용하고 감독하는 제도,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하고 책임지는 정부를 향한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과학의 언저리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장을 맡은 유국희 원자력안전위원장이 지난 22일 일본 외무성에서 도쿄전력 관계자들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시찰 항목을 확인하기 위한 기술 회의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정부 입김 아래 있는 이들이 아무리 전문가라 한들, 어떤 입장을 내겠는가.”
5월13일치 <한겨레> 사설에서 읽은 문장이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처리와 방류의 안전성을 검토하는 시찰단에 참여할 정부 연구기관 소속 전문가들을 믿기 어렵다는 취지의 얘기였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로 불리며 활동하는 사람이 들으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전문가란 각자의 지식, 경험, 양심을 바탕으로 누구의 입김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서 “아무렴 그렇겠지”라며 공감할 사람이 적지 않다는 데에 우리의 위기가 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유국희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장은 21일 일본으로 떠나면서 마치 이런 우려를 반박하듯이 “분야별로 최고의 전문가분들이고 또 실무진분들이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경도되지 않고 과학적인 근거 그리고 과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안전성을 계속 확인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관계에 따라 기울지 않는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시찰하고 판단할 테니 믿어달라고 당부하는 얘기였다. 이를 위해 시찰단장이 내세운 말은 “과학의 영역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시찰을 둘러싼 정치권의 다툼이나 시민의 불안에는 거리를 두면서 “일본이 보유한 설비가 제대로 된 것인지, 방류 절차와 과정은 적절한지를 과학의 기준으로 검토할 것”이라고도 했다. “정부 입김”을 막아낼 정도로 견고한 “과학의 기준”이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4일 현재까지 시찰단은 아직 활동을 마치지 않았고, 이들이 26일 귀국한 다음 시찰 결과를 종합해 후쿠시마 오염수에 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구체적으로 예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최고의 전문가분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시찰 결과를 발표한다고 해도, 후쿠시마 오염수를 둘러싼 사회적 우려와 논란은 잦아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든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든 불안과 대립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과연 “정부 입김” 없이 “과학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는지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을 것이고,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과학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2023년 한국에서 과학과 전문가는 충분히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서는 과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과학의 작동이란 단지 방사능 측정기기가 오류 없이 동작하는 것이나 에너지 보존법칙이 성립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기기와 법칙은 우리의 신뢰와 상관없이 대전의 실험실과 후쿠시마의 원전에서 대체로 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한 공동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든든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공동체의 지속적인 신뢰가 있을 때만 작동할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신뢰는 과학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과 조직, 이를 운용하고 감독하는 제도,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하고 책임지는 정부를 향한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과학의 언저리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역사적, 정치적 신뢰가 부족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과학의 영역에 집중”하고 “과학의 기준”으로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가 성공하기 어려운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신뢰가 쌓이지 않은 관계에서 한쪽이 제시하는 “과학적인 근거”와 그 해석이 국경을 넘어 상대방에게 흔쾌히 수용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에서는 과학도 그 생산자와 산지를 따지게 된다. 국경 양쪽의 각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갈등 국면의 과학은 전달자와 무관한 메시지로만 존재할 수 없다.
전문가 시찰단이 방대한 오염수 데이터를 받아 들고 국경을 넘어 돌아오는 것은 복잡하게 얽힌 과학적, 정치적, 역사적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를 다루는 정부, 언론, 과학계가 해야 할 일은 “과학과 전문가를 믿으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전문가를 믿어도 괜찮겠다고 느낄 수 있는 사회적 풍토를 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