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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역사의 퇴행’ 실감 나게 하는 ‘분신 배후 의혹’ 보도

등록 2023-05-21 14:11수정 2023-05-22 02:39

권영길 민주노총 지도위원(오른쪽 둘째)이 지난 17일 언론노조 기자회견에 참석해 <조선일보>의 ‘분신 배후 의혹’ 보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권영길 민주노총 지도위원(오른쪽 둘째)이 지난 17일 언론노조 기자회견에 참석해 <조선일보>의 ‘분신 배후 의혹’ 보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춘재

논설위원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을 상징하는 말 가운데 ‘역사의 퇴행’이란 말을 요즘 부쩍 실감한다. 최근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민주노총 건설노조 양회동 지대장의 극단적 선택에 ‘배후 의혹’을 제기한 것은 마치 32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언론사는 자신들에 호의적인 정권에 유리한 기사를 생산하는 능력만큼은 탁월하다. 정권 핵심 인사들과 ‘정권의 지팡이’를 자처한 경찰 수장이 이런 기사에 호응하는 행태도 그때와 똑같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시작을 알린 것은 1991년 5월9일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였다. ‘분신 현장 2~3명 있었다. 검찰 자살방조 여부 조사’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가 김기설씨의 죽음에 대한 악의적 망언을 기정사실화한 ‘검찰 받아쓰기’였다. 노태우 정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분출된 민중의 개혁 요구를 공안정국으로 돌파하기 위해 검찰에 ‘분신 배후 수사’를 지시했다. 정치검사의 ‘원조’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하들은 배후 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혈안이 됐다. 조선일보는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이 흘려준 목격자 진술을 덥석 받아 “검찰은 옥상에서 목격된 청년들이 김씨의 분신을 도왔거나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들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썼다. 이 기사는 앞서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망언과 맞물려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줬다. 조선일보는 “그(박홍)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 (중략)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사설까지 썼다.

하지만 검찰이 흘린 목격자 진술은 날조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검찰이 지목한 목격자를 인터뷰한 뒤 “검찰에 ‘분신 현장에 2~3명이 있다’고 진술한 적 없다”는 기사를 같은 날 보도했다. <한겨레>는 이 목격자를 직접 만난 뒤 “분신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고, 출근길에 건물 옥상에 흰색 점퍼를 입은 사람 1명이 있는 걸 보았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또 ‘흰색 점퍼를 입은 사람’은 ‘분신 사고를 수습하러 옥상에 올라간 서강대 학생’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분신 장면을 모두 지켜봤는데, 당시 옥상에는 김씨 혼자뿐이었다”는, 경찰이 확보한 다른 목격자(서강대 학교 차량 운전사)의 진술도 보도했다. 검찰이 흘린 정보가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취재의 ‘기본’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검찰이 이 사건을 김씨의 동료였던 강기훈씨의 유서 대필 사건으로 몰아갈 때도 검찰이 흘린 수사 내용을 그대로 받아썼다. 검찰은 분신 현장에서 발견된 김씨의 유서가 강씨의 필적과 유사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허위 감정 결과만 갖고 강씨를 재판에 넘겼다. 분신 배후를 입증할 직접적 증거가 없었지만, 당시 법원을 장악한 ‘공안 판사’들을 믿고 기소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사법사에 길이 남을 치욕스러운 역사다. 그러나 검찰의 ‘유서 대필 조작’은 대성공이었다. 재야운동권을 비윤리적 집단으로 낙인찍어 시민들을 이들과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그 덕분에 노태우 정권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강씨는 2015년 재심 무죄 판결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의 피폐해진 삶까지 보상받지는 못했다.

지난 17일, 18일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기사는 32년 전보다 더한 함량 미달의 기사였다. 그런데도 건설노조 주무 장관인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분신 배후 의혹’에 동조하고 나섰고, 한덕수 국무총리와 윤희근 경찰청장은 건설노조 집회에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집권 여당은 집회 해산에 살상용 무기인 물대포까지 동원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은 마치 32년 전의 ‘마녀사냥’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검찰이나 경찰이 나서서 뭔가 ‘한 건’ 해주길 기대하는 걸까. 그러기엔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유서 대필이라는 ‘망상’을 어엿한 ‘사건’으로 만들어낸 게 바로 검찰 안에서 엘리트로 통하는 검사들이었다. 지금 윤석열 사단이 장악한 검찰 안에서도 ‘제2의 김기춘’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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