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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크라이나에서의 남북전쟁 [김연철 칼럼]

등록 2023-05-14 18:24수정 2023-05-15 02:38

이 전쟁은 ‘포격 소모전’으로 전환됐다. 지금은 양쪽 모두 포탄 부족에 시달린다. 우크라이나는 3월까지 한달에 11만발의 포탄을 사용했고, 미국과 유럽에 한달에 25만발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보관 중인 포탄을 지원하고, 양산 능력을 갖춘 한국의 155㎜ 포탄을 원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동부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 포탄이 터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바흐무트/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동부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 포탄이 터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바흐무트/로이터 연합뉴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조선 청년 양경종은 1943년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에서 소련 군복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는 앞서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소련의 포로가 됐고, 소련군에서 다시 독일군 포로로, 그리고 독일 군복을 입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됐다. 이후 그는 영국 포로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앤터니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책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역사학자는 식민지 청년이 휘말린 믿기 어려운 사연으로 이 전쟁의 세계성을 부각했다.

80년이 흐른 현재, 이번에는 한반도의 포탄이 멀고 먼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등장했다. 정부는 살상무기 지원 불가 원칙을 말하지만, 해외 언론은 포탄 제공 가능성을 보도했다. 이미 미국의 도청 자료에서 밝혀졌듯이 한국 정부는 포탄 지원 방안을 논의했고, 폴란드 총리가 “한국 포탄을 전달하는 문제를 한국과 협의했다”고 밝혔으며, 정부·여당이 포탄 지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회 수출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적대적인 반러시아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왜 우크라이나에 한국의 포탄이 필요한가? 전쟁이 일어난 지 한해가 지나면서, 이 전쟁은 ‘포격 소모전’으로 전환됐다. 지금은 양쪽 모두 포탄 부족에 시달린다. 우크라이나는 3월까지 한달에 11만발의 포탄을 사용했고, 미국과 유럽에 한달에 25만발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미국과 유럽은 포탄 생산능력을 늘리고 있지만, 생산량을 갑자기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보관 중인 포탄을 지원하고, 양산 능력을 갖춘 한국의 155㎜ 포탄을 원한다.

북한도 이 전쟁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북한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루한스크)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건설노동자를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이들 공화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건설노동자 수출을 금지하는 유엔 제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제재 대상국이기 때문에, 앞으로 북·러 양국의 제재 무력화 시도는 늘어날 것이다. 러시아도 포탄 부족 현상에 시달리면서 북한의 포탄 지원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해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진입했다. 70년 전 한국전쟁 당시의 수준으로 세계적인 군수보급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전쟁 수행 능력에서 우열이 가려질 것이다. 러시아는 무기 원료에서 탄약공장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고, 러시아 경제도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재정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일정 기간 이상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고 있다. 푸틴은 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 결국 시리아 내전처럼 ‘잊혀진 분쟁’으로 만들려고 한다.

미국도 이미 우크라이나에 1천억달러 이상을 지출했고, 총력지원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부가 시간을 가졌다면, 민주주의 정부는 선거라는 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 내부적으로 장기전에 대한 피로감이 나타나고,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소극적이며, 미국 정부 안에서도 장기전은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늘어나는 만큼, 동맹국에 비용 분담을 요구할 가능성이 커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핵전쟁의 공포도 여전하다. 푸틴은 지난 2월 미국과의 핵무기 감축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 중단을 선언했고, 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 배치를 발표했다. 푸틴의 핵 위협은 서방의 개입을 경고하고 러시아의 승리를 자신하는 심리전에 가깝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이,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이, 핵무기가 있어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물론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전술핵이든, 혹은 ‘저위력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세계적인 차원에서 비확산 체제는 붕괴하고, 그만큼 인류를 절멸시킬 핵전쟁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70년 전의 한국전쟁처럼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변해가고 있다. 남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동북아 지역을 나누고, 나아가 세계의 분단선으로 자리 잡으면 안 된다. 장기전으로 진입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한반도가 포탄의 무기고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80년 전 조선 청년 양경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주권국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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