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워싱턴디씨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 등 국내 대기업 총수들, 미국 기업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 경제사절단은 122명이다. 역대 대통령의 첫 방미를 기준으로 보면, 6년 전 문재인 정부(52명)와 10년 전 박근혜 정부(51명) 때의 2배가 넘는다. 15년 전 이명박 정부(26명)와 비교하면 무려 5배다. 삼성·에스케이 등 4대그룹 총수와 6대 경제단체장이 모두 참여한 것은 2003년 이후 20년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한국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경제사절단을 함께 보내 해외 수주, 수출 상담, 투자 유치를 위한 좋은 기회로 활용했다. 과거 조선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연행’을 적극 활용한 것과 비슷하다. 단순한 외교 행위에 그치지 않고,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선진문물을 접하고 수입하는 창구로 삼았다.
하지만 한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면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재벌 대기업은 정부 못지않은 자체 네트워크와 인맥을 자랑한다. 굳이 경제사절단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2030년 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해 최근 외국에 다녀온 한 인사는 “외국의 대통령, 수상 등이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 대기업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 대기업의 위상 변화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미-중 갈등 이후 안보와 경제를 연결짓는 경제안보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면서 경제사절단의 득실에 대한 전략적 재검토가 긴요해졌다. 미국은 한국 기업을 중국 봉쇄에 동참시키기 위해,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힘겨루기를 한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 비중이 40%에 달하고, 미·중 시장 모두 포기할 수 없는 한국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통상환경이다.
더구나 미·중 경쟁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불확실하다. 승자가 판가름나려면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리의 최선은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미국 없는 중국시장’과 ‘중국 없는 미국시장’에서 최대한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안보와 경제를 철저히 분리하는 정경분리 정책이 필수다. 그레이엄 앨리슨 미 하버드대 교수가 말한 ‘투키디데스의 함정’(기존 무역강국과 신흥 무역강국 간의 전쟁 가능성)에 휘말릴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미·중과 역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중국이 미 기업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한국의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중국의 반도체 부족분을 메우지 말아 줄 것을 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파이낸셜타임즈>가 윤 대통령의 방미 직전에 보도했다. 미국이 ‘확장 억제’의 대가로 경제적 ‘청구서’를 내미는 것은 진작부터 경계했던 일이다.
윤 정부로서는 “기업의 비즈니스에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고 정경분리 원칙을 분명히 할 기회였다. 하지만 미국 도청사건 때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대신 미-중 경제전쟁의 총알받이가 될 위험성이 있는 삼성과 에스케이까지 포함한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향했다. 맹수(미국) 앞에 먹잇감(한국 기업)을 갖다 바친 꼴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윤 정부의 대응이 이런 수준이니 방미 경제성과와 관련해 “한국이 현금을 주고, 미국으로부터 어음을 받았다”는 혹평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정부여당과 보수언론이 “세일즈 외교 대성공”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가짜뉴스에 가깝다. 미국 기업의 59억달러 투자 결정과 50건의 양해각서 체결은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에 불과하다. 투자는 이미 발표한 것을 재탕하거나, 통상적 수준의 향후 투자 예상치를 합산 발표했다. 양해각서는 구속력 없는 문서일 뿐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의 양해각서만으로 10억 배럴의 원유를 확보했다고 정상외교 실적을 부풀렸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윤 대통령과 테슬라의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간 기가팩토리(생산공장) 투자 협력 논의도 ‘말잔치’에 가깝다. 미국 언론은 이미 연초에 테슬라가 인도네시아에 기가팩토리 건설을 위한 합의에 근접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기업을 옥죄는 인플레이션감축법과 반도체과학법의 독소조항에 대한 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도리어 “한국에서도 일자리를 만든다”고 딴전을 피워 한국 국민을 기가 막히게 했다.
반면 한국 대기업들은 10조원 규모의 배터리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2년간 1000억달러(133조원)의 대미 투자 선물을 안겨준 바 있다. 윤 대통령이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에 쏟아부은 투자와 일자리 창출 효과를 세세히 언급하며 박수와 환호성을 받을 때 국민은 다시 한번 기가 막혔다.
선진국의 경우 국가정상이 외국을 방문할 때 대규모로 기업들을 동반하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경제단체의 한 간부는 “미국 대통령, 일본 총리, 중국의 국가주석이 방한할 때 자국 기업인을 대규모로 동행하는 것을 본 적 있느냐”고 되물었다. 정부가 국가와 기업 이익을 생각한다면 정경분리 원칙을 분명히 하고, 그동안 관행처럼 이어져 온 대기업 중심의 대미 경제사절단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미-중 경제안보 정책의 ‘조공품’이 될 수 있는 대기업은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독자적인 네트워크 역량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 앞에서 폼 잡을 생각이 아니라면, 더구나 미국에 ‘조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경제사절단의 구조조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과거 정부에서 전력이 있다. 이명박 정부 때까지는 경제사절단에 상위 대기업만 참여했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으로 중소·중견기업을 경제사절단에 포함시켰고, 문재인 정부도 이를 따랐다. 이번 경제사절단에도 중소기업이 70%를 차지한다.
방미에 동행한 경제6단체가 지난 1일 주요 신문 1면에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 성과를 환영한다”는 지지광고를 냈다. 전경련은 사절단 참여기업 대상으로 성과 조사 결과 ‘매우 만족 또는 만족’이라는 응답이 90%에 달한다는 보도자료도 내놨다. 부정적 평가가 우세한 여론조사 결과와 딴판이다. 경제단체들은 국익과 회원사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대기업 중심 대미 경제사절단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커녕 권력의 눈치를 보고 국민여론과 동떨어진 주장을 한다. 전경련이야 정경유착 사태 이후 잃어버린 재계 위상을 되찾기 위해 무리한다고 하지만, 다른 경제단체까지 중심을 못잡는 것은 딱한 노릇이다. 윤 정부가 검찰권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제계가 ‘공포 분위기’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윤 정부의 임기가 끝난 이후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는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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