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각) 워싱턴디시 국방부 총서(펜타곤)에서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워싱턴/윤운식 선임기자
박민희ㅣ논설위원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온 ‘워싱턴 선언’은 미국 외교의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북한 핵·미사일에 불안해 하는 한국에 ‘확장억제 문서화’란 선물을 준 듯 보였지만, 미국의 더 큰 목표는 한국의 자체 핵무장 움직임을 완전히 봉인하는 것이었다.
올해 1월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발언한 윤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불러 “핵 개발 절대 안 한다”는 선언을 하게 한 것이다.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이 합의는 핵무기 확산 방지라는 미국 국가안보 전략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라며 “미국팀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여기서도, 미국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워싱턴 선언’은 미국의 전략핵잠수함(SSBN)이 동아시아로 들어오게 된다는 점에서 중국을 불편하게 하지만, 한국의 핵 개발을 막음으로써 대만 등으로 핵확산 도미노가 일어나는 상황은 차단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리는 “사전에 중국에 브리핑을 했고, 우리가 왜 이 조치를 취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중국과 갈등하고 경쟁하지만, 핵 강대국끼리 물밑에서 이익을 조율하고 있다는 현실을 윤석열 대통령은 똑바로 보아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방미를 통해 한국 외교에서 ‘중국’을 아예 지워버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달 27일 미국 의회에서 한 영어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는 ‘자유의 나침반'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국 진영의 선봉에 서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윤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남북관계와 대만 문제를 비교하면서 중국을 자극했다. 지금 동아시아 정세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다”는 언급은 필요하나, 대만을 남북관계와 비교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우리가 먼저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발언은 부작용만 크다. 2일에는 중국을 향해 “(대북) 제재에 전혀 동참을 안 하면서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 정부에서 친중 행보를 했지만, 돌아온 게 뭐냐”는 말까지 했다. 중국과는 잘 지낼 필요가 없고, 미국과 같이 가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을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윤 대통령은 북한·중국·러시아는 아예 지워버리고, 미국·일본만 크게 그린 나침반과 지도를 들고 외교를 해왔다. 윤 대통령이 이번 방미에서 많은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한국 기업들이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미국의 보호주의로 처한 어려움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침묵을 지킨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대통령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보조금을 받으려면 민감한 기밀까지 미국에 제출해야 하고 중국 반도체 공장에 새로운 설비를 증설하기 어려워진 문제에 침묵하고, 미국 기자가 ‘미국 정부의 보호주의 때문에 한국 같은 동맹이 입는 피해’에 대해 질문하는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윤 대통령은 중국과는 외교도, 경제관계도 더이상 필요가 없고,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피해를 입어도 미국 시장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한국 경제가 처한 복합 위기에 어떤 해법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은, 중국이 경제 보복에 나서면 한국 기업들의 어려움을 모두 ‘중국 탓’으로만 돌리려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년은 외교로 분주했지만,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외교 원칙이 흔들리고 성장 동력은 약화되고 있다. 윤 대통령에게 외교란 극우, 강경파 지지층을 향해 ‘문재인 정부의 친중, 친북 외교를 뒤집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듯 보인다. 거기에 맞춰 한미·한미일 협력 강화만 외치며 돈키호테처럼 질주했다.
그 결과는 이제 보수 지지층마저 불안하게 만들 정도다. ‘워싱턴 선언’에 대해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까지 차단한 “족쇄”라는 보수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재계에서는 한국 경제가 미래 산업의 동력도, 중국 시장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7~8일 방한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외교에서 배워야 한다. 일본은 중국의 위협을 경계하면서, 군비 강화를 추진하고 중국의 홍콩·신장위구르 탄압 등에 대해서도 미국·유럽과 보조를 맞춰 비판해왔다. 동시에, 조용히 중국과의 물밑 외교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시다 총리가 시진핑 주석과 캄보디아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지난 2월 말에는 중-일 외교·국방장관 회담이 열렸고, 4월에는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중국을 방문해 리창 총리, 왕이 정치국위원, 친강 외교부장을 만났다. 중국과의 의원 외교도 긴밀하다. 중국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의 활동은 여전히 탄탄하다. 기시다 총리는 4월 말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의 패권적 야망을 제어하기 위해 일본이 군사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즉답을 피하고, “능동적인 외교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올 하반기에 기시다 총리가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미국, 일본은 중국과 국제질서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치열하게 경쟁·갈등·거래하는 복합 외교를 하고 있다. 한국도 중국과의 과제와 갈등 요인 등을 대화를 통해 관리하는 종합적 전략을 세우고 움직여야 한다. 중국과 긴밀하게 이어진 한국 경제가 변화한 국제질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고 여건을 만드는 것은 정부의 의무다. 북핵 문제에 대해 중국의 태도가 유감이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투정하듯 말할 게 아니라, 중국을 만나 설득하고 주고받아야 한다. 대통령은 ‘미국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한국의 입장에서 제대로 요구하고 거래하는 진짜 외교를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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