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26일(현지시각) 워싱턴디시(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완 | 산업팀장
“기업들에는 당연히 안 좋죠. 누구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구와도 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지난달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한 대기업에서 영업·전략 업무로 잔뼈가 굵은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그에게 앞으로 러시아와 중국 사업 전망을 묻자 “끝”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미국과 더 밀착했다는 것보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차갑게 식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누구와 척을 지면 그 지역은 아예 못 하는 것이라니까요.”
기업들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현대자동차는 판매량 1위까지 치고 올라갔던 러시아에서 현지 공장 철수 수순에 들어갔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중국 반도체 공장에 1997년 이후 54조원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미국의 대중 반도체장비 수출규제로 공장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반도체 업종은 기술 개발에 따른 첨단장비를 도입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잃는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 등 세계 경제가 급격히 ‘블록화’되는 파도를 한국 수출전략산업들이 그대로 맞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중국 관련 리스크를 짚어 화제를 끌었던 <차이나쇼크, 한국의 선택>의 저자 한청훤씨는 위기의 파고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건 정부가 속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세계가 권위주의 블록과 자유민주주의 블록으로 나뉘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는데, 보폭을 너무 빨리 자유민주주의 블록으로 가버린 거예요.” 중국과 협업하는 반도체 업체에서 일했던 한씨는 이런 변화에 민감했다. “(우리 기업들이)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몇년은 있을 줄 알았어요. 그 시간이 확 빨라진 것이죠. 미국에 몰빵 하든, 속도 조절을 하든 준비가 돼야 하는데 그게 안 돼 문제”라고 했다.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한 윤석열 대통령은 현장의 이런 사정들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바이든 행정부가 쏟아낸 대중 반도체 규제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은 국내 반도체·전기차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지원법 등을 두고 “서로 간의 윈윈”이라고 말할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 앞에서 “자유”를 46번이나 외치는 연설을 할 때, 우리 기업의 어려움에 관해서 한번이라도 역설해야 하지 않았을까.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41%나 급감했다. 중국으로 가는 물량이 크게 줄며 한국은 14개월 연속 무역적자를 기록 중이다. 반도체 대신 수출의 버팀목이 된 자동차도 안심할 수 없다. 미국 시장에서 재고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전기차를 리스 등으로 밀어내는 고육지책도 자동차 업계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있다. 우려했던 미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차별 효과다. 이런 상황에서 ‘영업사원’이 국외 출장을 나가 기립박수 등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고 자랑만 하면 회사 안에선 어떤 평가를 내릴까. 몇번이고 자신을 낮추더라도, 먹거리를 따내오는 게 훌륭한 영업사원 아닌가.
대통령실은 이런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양국 정상은 한국 기업의 부담과 불확실성을 줄여준다는 방향에서 명확하게 합의했다”고 자찬할 뿐이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기업들의 투자와 사업활동에 특별한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성과라고 내세웠다.
기업들은 이제 국외 진출을 위한 현지 공장 건설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우리 정부가 신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 대기업의 영업·전략통 담당자는 “지금 잘나가더라도 한순간에 딱 무너질 수 있어요. 지금이 그런 상황이에요”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과연 우리 기업들에 국제정세 변화에 대비할 최소한의 시간은 마련해 주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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