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김지석칼럼
월급이 삼백만원이 넘는 친구가 생활이 너무 쪼들린다고 하소연을 한다. 엄살이 아니다.
우선 사교육비가 만만찮다. 고3인 장남의 사교육비로 지난해에 대략 천만원을 썼다. 많은 돈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시간당 삼사만원이 보통이니까 연간 삼백 시간, 주당 여섯 시간이면 그렇게 된다. 일주일에 두 곳, 많아야 세 곳이다. 어쩔 수 없는 고정지출도 상당하다. 아파트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아야 하고, 부모님과 처가에도 얼마씩 보낸다. 애들 대학 학비도 조금은 모아놔야 한다. 의료비 등 비상금도 필요하다. 은퇴 이후 생활이나 애들 결혼 등 먼 미래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네 식구 생활비로 쓰는 돈은 백만원 남짓하다. 경조사와 술자리가 부담되고 외식 한 번 하기도 쉽지 않다.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생활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힘겹게 느껴진다.
이 친구 수입이면 저소득층은 아니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지난해 4분위 계층(상위 20~40% 소득층)의 월평균 가구소득이 348만원이고 3분위(40~60% 소득층)가 255만원이니, 상위 35% 정도쯤 된다. 건강보험에 가입한 직장인 천만명의 소득순위로는 상위 25% 안에 든다.
빈곤은 일부 계층의 문제가 아니다. 연간소득 2500만원 이하인 가구가 절반을 넘고, 이 중 40% 가량은 천만원 아래쪽이다. 이들 모두 좋은 말로는 서민이고 생활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일상에 심하게 시달리는 빈민이다. 양극화 해소가 국가적 의제가 될 만큼 소득 격차도 커지는 중이다. 지난해만 해도 5분위 계층(상위 20% 이내)의 소득은 전년보다 5% 늘었으나 1분위(하위 20%)와 2분위(하위 20~40%)는 2.1%와 2.6% 증가에 그쳤다. 저소득자일수록 소득 증가율도 떨어지는 구조가 정착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다수 국민을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빈곤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세계적 추세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교육과 주택, 사회 안전망은 국가 차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 세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저소득층은 물론이고 상위 20~30% 소득자까지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개혁이다.
정부는 최근 조기 타결을 목표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시작을 선언했다. 경제·사회의 체질을 미국식으로 바꿔 새로운 탈출구를 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큰 착각이다. 미국은 소득격차가 아주 심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상위 20% 가구가 전체 소득의 41%를 차지하지만 미국은 50%다. 미국은 지난해 7258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에 맞먹는 규모다. 올해 예상 재정적자도 4천억달러 가까이 된다. 이런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나라는 ‘패권국 미국’밖에 없다. 미국은 외환관리에서 자유롭고, 내부 모순을 밖으로 전가할 갖가지 수단을 갖고 있다. 미국과 비슷해지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진다.
한 세기 전 우리나라는 부국강병 경쟁에서 다른 나라에 뒤진 탓에 고통스런 역사를 겪었다. 이제는 풍요로운 국민과 강한 외교가 부국강병을 대신한다. 곧, ‘부민강교’의 시대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부끄러운 풍조가 있다. 성찰과 도전, 줏대 있는 노력 없이 무작정 강자의 옷자락만 잡으려는 이른바 ‘대추’(대세 추종주의)가 그것이다. 구한말과 일제 때 많은 권력자와 지식인의 행태가 그랬고, 민주화 이후에도, 특히 정권 후기가 되면 두드러진다. 대추는 부민강교가 아닌 ‘빈민약교’를 낳는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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