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을 둘러보고 나면 할머니들을 만났다. 일본 방문객들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국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그들을 보며 저 일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나와우리’라는 단체에서 일할 때였다. 일본 시민단체와 종종 교류했는데 ‘나눔의 집’에 찾아가거나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일정을 함께하곤 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에 있고 마당 한켠에 일본군‘위안부’역사관도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하던 1998~2000년 즈음만 하더라도 박두리, 김순악 할머니를 비롯해 많은 분이 살아 계셨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연표와 기록사진을 비롯해 위안소 설치 장소들을 담은 지도 등을 전시함으로써 당시 일본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는지 보여줬다. 역사관을 둘러보고 나면 할머니들을 만났다. 일본 방문객들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국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그들을 보며 저 일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답은 머지않아 나를 찾아왔다.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와의 인연으로 나와우리는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마을을 답사하게 됐다. 피스보트는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을 계기로, 일본에서 배운 역사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가진 일군의 일본 젊은이들이 직접 현지에 가서 역사 문제를 확인해보자고 만든 단체다. 피스보트가 베트남을 갈 때면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본 마을을 방문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을 알게 돼, 직접 현지에 가서 확인해보고자 1999년 베트남으로 향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이기도 했고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일본 사람들이 하는 것도 어쩐지 불편했다. 그리하여 나는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처음 방문한 한국인, 이 돼 그들과 만나버렸다.
한국군에 의해 남편을 잃고 어머니를 잃고 아이를 잃고, 몸과 마음에 깊고 깊은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이 냐짱과 꾸이년과 호이안과 다낭 등지에 살고 있었다. 남부에서 중부까지 고자이, 하미, 프억빈, 퐁니, 퐁녓… 곳곳의 마을마다 청룡, 백호, 맹호, 한국군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증오비, 위령비와 함께 쌓여 있었다.
우리는 조금 당황스럽게 서로의 표정을 보았다. 베트남 사람들에겐 ‘그날’, 한국군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무고하게 죽은, 이후 느닷없이 나타난 한국의 젊은이들이었고 우리에겐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 사람들, 은 집요하고 치열하게 기억의 퍼즐을 맞추었다. 누가 죽었는가, 왜 죽였는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무엇인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길고 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관광지도 도시도 아닌 조용한 시골 마을에 한국 사람들이 왔다는 건 빅뉴스이기도 해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이야기 자리로 찾아왔다. 이야기는 주로 마을 이장님이나 신망 있는 어른의 집에서 진행됐다.
아이들은 앞자리부터 차곡차곡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사탕수수를 씹다가 저희끼리 소곤소곤 속닥거렸다. 그러다 우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청년들은 무심한 척 뒷줄에서 팔짱을 끼고 이 자리를 지켜봤고 여자들은 부엌과 거실의 경계쯤에서 아기를 안거나 달래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경청했다. 늘 따뜻한 차가 우리 앞에 놓였고 때때로 레몬주스나 야자수가 나오기도 했다. 죽은 사람들 이름을 부르다 보면 그들과 함께 살았던 날들의 사무친 기억이 따라왔다. 참혹한 주검을 수습한 이야기 뒤에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 죽음보다 깊은 비애가 쫓아왔다. 불타 버린 집은 다시 짓고 황폐해진 논밭은 다시 일구면 되지만 복구될 수 없는 상처, 라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공유하게 됐다.
나는 미묘한 심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질문하고 대답하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어렴풋이 짐작도 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일본 시민단체들의 협조와 연대가 큰 힘이 됐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상관없이 많은 일본 단체나 개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천했다. 사실 일본에서 이 문제로 활동하는 것의 무게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일본 내 우익들과 싸워야 하고 정부와도 마찰을 빚어야 한다. 이 일을 하는 어떤 단체는 사무실도 계속 옮기고 전화번호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고 한다. 끊임없는 테러 협박과 위협으로부터 단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군의 일본인이 진심으로 이 문제에 함께하고 있다. 여전히.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도쿄에서 열린 것도 국가 간 경계를 벗어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려는 일본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서다.
로드스꼴라 학생들과 베트남으로 여행 갔을 때 일이다. 다낭대학 학생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날, 오전에 하미 마을을 방문했다. 1968년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다. 생존자 팜티호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같이 들었다. 로드스꼴라 학생들도 다낭대 학생들도 말이 없었다. 어쩐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하고 겸연쩍은 시간이 지나고 어쨌거나 그들은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낭대 학생들이 몰고 온 오토바이 뒷자리에 한명씩 짝을 지어 타고 어디든 가서 무엇이든 하고 오면 되는 것이 그날의 미션이었다. 서먹하게 옷자락을 잡으며 뒷자리에 탔던 학생들은 저녁 무렵 다시 모였을 때는 시끌벅적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어 보였다. 서로를 껴안고 연락처를 공유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선물을 교환했다. 누군가는 다낭대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같이 해 먹고 누군가는 여행자들은 절대 모르는 동네 맛집에 가서 현지식을 먹고 누군가는 대학교를 구경하고 누군가는 바닷가에서 실컷 놀다 왔다고 한다. 이 짧은 만남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눔의 집에도 장기 체류하며 자원봉사를 하는 일본 젊은이들이 있었다. 통역이나 번역 작업을 하고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역사관 청소나 할머니들의 식사 준비 등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했다. 여섯달에서 일년 넘게 자원 활동을 하며 그들은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고민과 갈등을 함께 나누곤 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하다. 과거의 기억을 해석하고 미래의 시간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토론하고 떠들고 경청하며 이야기가 넘쳐나게 해야 한다. 일본이든 베트남이든 북한이든 각계각층이여, 끈질기게 서로의 이야기로 만나는 것을 멈추지 말자. 그 힘이 정부의 태도를 새롭게 하거나 바꿀 것이다.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