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소설가 김훈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을 ‘졸렬한 짓’이라 했다. 그 짓을 해보려 한다.
영화 <길복순>을 봤다. 보는 내내 몰입이 잘 안됐다. 청부살인업자가 평범한 회사원 또는 엔터테인먼트업체 소속 연예인처럼 묘사된 모든 장면과 대사가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낯설게하기’가 감독이 노린 것일 테고, 이 영화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일본 야쿠자 두목과 목숨 건 일전을 벌여 살인 업무를 완수한 뒤 퇴근(?)해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무심히 장 보는 싱글맘, 떡볶이집에서 직장 애환을 나누고 위로하다 이직과 승진(?) 앞에 갑자기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이는 상황이 영화 끝날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삶 자체가 하루하루 목숨 건 투쟁이고, 마트에서 장 보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할 만큼 악착같이 살아야 하고, ‘일’이 ‘관계’를 앞서는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고. 영화는 ‘돈’ 외에도 에이스 명성을 유지하고픈 길복순의 허위의식도 드러낸다. ‘에이스 킬러’가 복순의 정체성이다. 직장인에게 월급보다 인정욕구와 자존감이 우선일 때가 적지 않은 것처럼.(이를 애사심 또는 장인정신이라고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속기도 한다.)
대중문화는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 가상화폐 투자 실패로 법률사무소 직원이 대학 동창인 주류회사 직원에게 청부살해를 의뢰하고, 이 직원과 배달업체에서 함께 일했던 30살 남성이 빚 갚으려 뛰어든 강남 납치살해도 비현실적 현실이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를 먹이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평소에도 이곳에선 수험생 대상으로 에너지드링크 등 각성 음료 시음행사가 일상인 게 현실이다.
이처럼 살아온 결과가 합계출산율 0.78명, 노인빈곤율 39%, 자살률 24.1명(인구 10만명당 자살자),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목숨 걸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책임져준다는 믿음이 없는 사회,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의사가 없는 사회에서 각자도생이 창궐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사회에선 관대함이 사라지고,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1750년 파라과이에서 일어난 실화를 그린 영화 <미션>(1986)에서 스페인 관료들은 원주민 학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원주민들은 셋째 아기를 낳으면 죽인다’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회 신부들은 ‘백인들의 노예사냥을 피해 도망가려면 부모가 한 아이씩 둘러업고 뛰어야 한다. 셋째까지 안고 가려면 온 가족이 다 붙잡힌다.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한다. 270년 뒤 한국은 그때 파라과이 원주민보다 덜 미개한가.
최근 정부는 ‘주 69시간제’를 들고나왔다. 극단적 사례라고 항변하지만, 설명이 어눌한 건 애초에 개인이 아닌 기업이 원할 때, 기업이 원하는 만큼 일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를 노동 ‘개혁’이라 한다. 죽기살기로 살아가는 곳에서 무슨 혁신이 일어날 수 있나. 몇년 전 미디어 스타트업 기업인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서울대 졸업생들이 스타트업에 많이 가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박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서울대 졸업장이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회사가 망해도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니까 질러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람들한테 스타트업 하라고 얘기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서울대를 나올 순 없다. 사회가 개인의 ‘서울대’가 되어줘야 한다.
196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개들을 별도 수용한 뒤, 가벼운 전기 충격을 계속 줬다. 첫번째 그룹에는 조작기를 누르면 전기 쇼크가 멈추도록 했다. 두번째 그룹에는 조작기를 눌러도 아무 변화가 없도록 했다. 24시간 뒤 낮은 울타리를 친 우리로 옮겨 똑같이 전기 충격을 줬다. 첫번째 그룹은 금세 울타리를 넘어 도망갔다. 두번째 그룹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전기 쇼크가 올 때마다 짖기만 했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다. 전기 쇼크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온몸으로 참아내며 고통만 호소할 뿐이다. 우리도 ‘24시간’이 다하기 전에 쇼크를 멈춰야 한다. <길복순>의 세계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두번째 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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