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타파]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대학 시절, 전민항쟁이 일어나 독재정권이 곧 무너질 거라는 매주 똑같은 결론만 내는 정세분석 회의를 뭐 한다고 그리도 열심히, 매주, 대접에 커피 타 마시며 했는지 모르겠다.
외신을 바로 접할 수도 없었고, 외국에서 무슨 책이 팔리는지, 유명하다는 책을 개인적으로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접할 수 있는 외신은 서구의 관점일 뿐이라는 폄하가 광범위했다.
1차 걸프전이 한참이던 1991년 3월 <말>지는 쿠웨이트 왕정의 부패상과 사담 후세인과 그의 바트당이 얼마나 아랍민족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는지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당시는 통일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던 시대였다. 기사를 보고 선악구도가 바뀐 사람이 많았다. 5·18의 비극을 알게 된 뒤, 국가의 모든 주장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저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전하지 않는 진실이 따로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나를 포함한 1950~60년대생들이 꽤 불행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학창시절에는 반공교육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국가에 대한 실망으로 국가의 교육으로부터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할 즈음에 또 다른 가두리 양식장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정보가 반쯤 차단된 시대. 우리는 양쪽 끝단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실연 때문이긴 했으나 멀리 떠날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거리 곳곳에 영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도를 보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인도 총독과 여러차례 만났던 간디와 네루가 한국에서라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상상해 보는 일이나, 빅토리아 여왕을 추념하는 타지마할 급의 대리석 건물인 빅토리아 메모리얼이 여전히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묘했다. 적어도 한국에서 온 나한테는.
반미 국가를 직접 눈으로 보겠다며 떠난 중동여행도 많은 걸 남겼다. (당시로서는 꽤) 위대했던 이상의 구현이 그저 단순한 경찰국가라는 사실에 쓴 입맛을 다셔야 했지만.
붓다가 깨달았다는 보드가야에서 해탈에 이르는 여덟가지 길, 즉 팔정도의 첫번째가 올바른 견해, 즉 정견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랐다.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는 전민항쟁이 일어나 이 세상을 모조리 바꿀 거라는 그 정세분석이 늘 틀렸던 이유는 정확하게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했다. 정도 틀리고 반도 틀리니 합이 맞을 리 없었건만. 그때는 우직하게 가는 게 승리의 길이고 그게 유일한 올바름이라 믿었다.
얼마 전 한 노동단체에서 내건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재정립’이란 구호를 보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던 생경함이 떠올랐다. 이제 한국은 외세나 외국기업이 노동자 탄압을 걱정할 나라가 아니라, 한국기업이 해외공장에서 현지 노동자를 탄압하지 않을지 더 걱정해야 하는 나라가 됐고, 실제 베트남에서 인도에서 그런 사례를 다룬 뉴스를 우리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지난 정부 시절 그토록 열광했던 ‘어쩌다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구호도 아니고, 정권이 바뀌었다 해서 금세 바뀌는 것도 아니다.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문화의 세계 진출은 ‘이게 문화 제국주의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1990~2000년대 던져주듯 사과 정도는 잘하던 일본이 근래 들어 신경질적으로 바뀐 큰 요인 중 하나로 한국의 성장과 그로 인한 초조함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이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관계로 전환됐고, 일본인들은 과거 식민지의 부상을 두고 종종 혼네(본심)를 숨기지 못한다.
인구가 줄고 지방이 소멸할 거라며 걱정하는 나라지만 한편에서는 하루 교통량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구간까지 도로를 확장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야산을 지나는 구간에도 방음벽이 설치된다. 요즘의 한국 같은 나라는 없다. 우리가 선진국을 부러워하는 새 우리는 특정 구간에 있어서는 이미 그들도 이루지 못한 영역까지 와버렸다. 이제는 좀 지체로부터 벗어났으면. 우리는 더이상 식민지배를 받는 민족도 나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