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선에 찍히면 어떤가? 문자폭탄 맞으면 어떤가? 비위에 거슬린다고 찍어내는 윗선도 문제고 팬덤이라고 의견이 다른 이들을 린치하려는 이들도 문제지만, 그에 맞설 배짱도 없으면 정치는 왜 시작했나?
지난해 7월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초선의원모임이 열리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찜질방은 한국 특유의 복합 레저공간이다. 찜질방과 목욕탕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도 있고 오락실, 독서실, 네일숍, 헬스장, 심지어 영화관을 갖춘 곳도 있다. 코로나로 예년 같진 않지만 명절 연휴에 특히 찜질방이 붐비는 건, 노인부터 아이까지 동반한 대가족이 다 함께 쉬고 즐길 만한 그만한 시설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 나들이 삼아 찜질방을 찾아도, 일단 입장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매의 눈으로 전체를 살피고 잽싸게 자리를 맡는 일이다. 빈 땅에 말뚝 박듯 매트리스를 끌고 와서 명당자리를 잡고 주인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식혜 잔과 간식거리를 펼쳐 놓는다. 한번 자리를 잡고 나면 행여 그 명당을 빼앗길까 파수를 서야 한다. 식사도, 간식도, 오락도 가족 간에 교대로 한다. 찜질방에 드나들 때도 누군가는 자리를 지킨다. 가족이 함께 즐기기 위해 찜질방을 찾았건만, 가족 중 누군가는 명당을 지키는 데 열중한다. 찜질방에 머무는 시간의 반 이상을 자리를 지키는 데 쓰다 나오기도 한다. 돌아보면 먼지투성이 공간일 뿐인데, 이럴 거면 뭐 하러 찜질방에 왔나. 고작 때 묻은 매트리스에 보초 서려고 돈 내고 들어왔나 쓴웃음이 난다.
여의도에 입성한 정치인들을 보면 찜질방이 생각난다. 찜질방 앞 명당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해 정작 찜질방에 들어온 목적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 <
한국일보>(3월28일치)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 13명을 심층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방향 잃고 표류하는 21대 국회의 단면이 드러난다. 현재 초선 의원은 156명으로 전체(299명)의 52%를 차지한다. 18대 국회가 개원한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국민은 물갈이를 기대하며 반수 넘는 초선을 당선시켰지만 21대 국회에서 신선함과 담대함으로 그 기대에 화답하는 초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인터뷰에 응한 초선 의원들은 “당 지도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까 봐” “비공개 발언도 노출돼 공격받는 상황에서 팬덤 눈치가 보여서” 어쩌지 못한다며 무기력과 의욕 상실을 호소한다.
‘윤심이 곧 당심’이라며 친윤석열계 일색으로 전당대회를 치른 국민의힘에서 초선 의원 63명 중 50명이 “대통령을 흔들지 말라”며 나경원 전 의원의 당대표 출마를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처음엔 40여명으로 시작했는데 연판장에 이름이 빠져 있던 초선 의원들이 윗선에 찍힐까 부랴부랴 뒤늦게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초선들의 자발적 경쟁적 투항이다.
민주당 초선 의원들 상황도 다르지 않다. 친이재명계 초선 의원 모임인 ‘처럼회’는 민주당 진골 리스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재명 당대표 체제에서 강성 팬덤과 결합해서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병풍 역할을 도맡는다. 진골 명단에 못 들어간 의원들은 겉만 파랗고 속은 빨간, 이른바 ‘수박’ 색출 사냥의 표적이 된다. 일부 의원들은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참고 말 안 하는 게 관행이 되다 보니” 무력감과 자조감이 든다고 고백한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고 악화는 새끼 악화를 재생산한다. 내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할세라 눈 닫고 입 막은 의원들이 부지기수인데,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지망생들조차 당 주류의 동아줄을 잡으려고 혈안이다. 국회의원은 한명 한명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공산당 거수기도 아니고 문화혁명 홍위병도 아닌, 소신 있는 의원들의 다양한 정치적 배색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토대다. 지금 우리의 정치적 토대에서는 어떤 싹이 자라고 있는가?
양당정치가 비판받을 때마다 선거제도 개혁하고 공천 물갈이하겠다고 공언하지만 매번 공염불로 끝나버린 전철을 국민은 알고 있다. 그러다 안 되면 비대위니 혁신위니 하는 간판 걸고 또다시 그 나물에 그 밥인 수뇌부 교체로 땜질하는 것도 상례다. 걸핏하면 비대위란 이름으로 비상이 정상보다 자주 등장하는 비상식적인 정치가 일상이다.
해법은 사실 단순하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중에 일부라도 재선을 목표로 삼지 않고 제대로 된 정치를 목표로 삼으면 된다. 윗선에 찍히면 어떤가? 문자폭탄 맞으면 어떤가? 비위에 거슬린다고 찍어내는 윗선도 문제고 팬덤이라고 의견이 다른 이들을 린치하려는 이들도 문제지만, 그에 맞설 배짱도 없으면 정치는 왜 시작했나? 현재의 거대 양당에 절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유권자층은 소신 있는 정치인들을 위한 블루오션이다. 집착을 버리면 더 큰 기회를 국민은 준다. 왜 들어가라는 찜질방은 안 들어가고 명당자리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걸로 임기 4년을 허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