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는 ‘낡은 세계’의 숙제를 방기하는 핑곗거리가 된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과 산업안전은 ‘신세계’에서 의미가 없거나 새로운 의미를 마술처럼 획득한다. 이전 기술혁명 시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늘 사회적 요구사항으로 등장했지만, 이젠 낯선 주제가 돼버렸다. 오히려 ‘신세계’ 기술로 노동의 ‘유쾌함’이 늘어난 것인 양, 노동시간을 연장하자는 주장마저 나온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이번에는 다르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스웨덴의 마이아 에켈뢰브는 청소노동자의 삶을 기록해 두었다. 그의 일기소설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에는 1960년대 대사건들이 고단하고 평범한 삶의 렌즈에 포착돼 있다. 내일이면 세상이 곧 무너질 것처럼 방송과 신문에서 떠들어댔지만, 세상은 청소의 일상처럼 그럭저럭 버텨내었다. 하지만, 그의 담담한 글쓰기가 어두워지는 대목이 있다. 낯선 기술이 몰려온다는 소문 때문이다. “오늘 밤에는 미래가 두렵다. 공장이 하나둘씩 차례로 문을 닫는다. (…) 자동화와 컴퓨터가 없는 곳이 없다.” 1967년 2월의 기록이다.
오늘날 기술의 잣대로 본다면, 그 당시 ‘조악한’ 수준의 자동화와 컴퓨터에 대한 걱정이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늘 두려움을 앞세웠고, 전문가와 언론은 ‘믿거나 말거나’ 분석으로 공포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예전에도 그랬다고 하면 ‘이번에는 다르다’는 항변이 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학습로봇과 인공지능을 앞세운 4차 산업혁명의 깃발이 세워지자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신세계’의 도래를 구가하는 용어들이 쏟아졌다. 예전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제2의 기계시대”가 와서, 이제 인간은 기계와의 가망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고 했다. 너나없이 일자리 파괴를 걱정했다. 인간들의 참혹한 일자리 경쟁을 예언하는 묵시록이 뒤따랐다.
다른 점도 있었다. 컴퓨터 기술 덕분에 예전과 달리 구체적인 예측치가 쏟아졌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연구팀이 먼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미국의 경우 일자리 45%가량이 십년 안에 소멸할 위기에 있다고 발표했다. 영국과 독일도 일자리의 35%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언론에서는 이 한줄기 신호탄을 ‘세기의 불꽃놀이’로 증폭했다. 1980년대에 떠들썩했던 “노동의 종언”도 되살려 냈다. 전세계 기술혁명의 아이콘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숙명’을 받아들이고 생존의 방책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세계경제포럼은 이 열광적인 반응을 모아 다보스의 차가운 눈더미도 녹일 기세로 뜨겁게 논쟁을 이어갔다.
세계화의 시대였으니, 개발도상국도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개발도상국 빈곤 퇴치를 목표로 하는 세계은행이 나섰다. 자동화는 비숙련노동에 보다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연구의 결론은 파국적이었다. 개발도상국 일자리의 3분의 2가 자동화의 희생양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 국제노동기구(ILO)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참담한 수치를 발표했다. 교육훈련 투자만이 살길이라고 믿었던 개발도상국들은 아연실색했다. 일자리 파괴의 ‘쓰나미’ 속에서 무슨 교육훈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 ‘화려한’ 수치들에 대한 의문도 컸다. 일자리 파괴만 보고 일자리 창출을 따지지 않은 편향된 수치라는 주장도 나왔고, ‘위험’이라는 표현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선정적인’ 수치라는 얘기인데, 바로 그 선정성 때문에 학계와 언론의 반응은 식을 줄 몰랐다. 5~6년이 지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좀 더 엄밀한 분석을 한 결과 일자리의 14%만이 자동화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발표했을 때, 학계와 언론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일자리 총량만 두고 보면 쓰나미는 없었다. 일자리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해서, 전체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오이시디의 ‘미지근한’ 수치마저도 사실상 과대추정이었다. 결국 ‘이번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틀린 예측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예측으로 야단법석을 피우는 데 시간과 힘을 쏟아붓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것을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자리 총량은 크게 변하지 않았더라도, 좋은 일자리의 파괴와 나쁜 일자리의 창출로 일자리의 양극화가 가속됐을 수 있다. 당시 통계적으로 확인된 사실이었다. 따라서 가뜩이나 높은 불평등 상황에서 이런 양극화는 정책과제로 뜨겁게 다뤘어야 했지만 변죽만 울렸고, 내세울 만한 정책 변화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플랫폼 경제의 ‘신세계’가 가져다준 것은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의 확대다. 4차 산업혁명의 불꽃놀이에 바빠서, 인간 사회는 화약통을 만들고 챙기는 노동자에게 최저임금과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 불꽃의 화려함에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니, 화약통 옆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기술혁신의 독점과 부의 집중을 막을 뚜렷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기술혁명의 풍요로운 시대에 불평등 해소를 위한 재원은 늘 없거나 부족하다.
또 있다. ‘신세계’는 ‘낡은 세계’의 숙제를 방기하는 핑곗거리가 된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과 산업안전은 ‘신세계’에서 의미가 없거나 새로운 의미를 마술처럼 획득한다. 이전 기술혁명 시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늘 사회적 요구사항으로 등장했지만, 이젠 낯선 주제가 돼버렸다. 오히려 ‘신세계’ 기술로 노동의 ‘유쾌함’이 늘어난 것인 양, 노동시간을 연장하자는 주장마저 나온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이번에는 다르다’.
요즘 다시 뜨겁다. 챗지피티(ChatGPT) 때문이다. 알라딘 램프처럼, 묻고 청하면 알려준다. 인간보다 더러 똑똑하고, 인간보다 항상 친절하다. 그래서 인간이 더 열광한다. 결은 다르지만, 10년 전 열광이 돌아온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자리 파괴 걱정이 쏟아진다. 얼마 전 챗지피티 연구진이 발표했다. 업무의 50% 이상이 챗지피티 모델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일자리를 계산해 보니, 약 19% 정도 된다고 한다. 다른 유사 모델이나 기술까지 고려하면, 위험에 처한 일자리는 49%에 육박할 것이라고 한다. 언론은 열렬하게 반응했다. 조만간 “이번에는 다르다”는 말이 나오겠다.
답답해서 챗지피티한테 물었다. 당신이 일자리를 파괴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짧은 질문에 긴 답이 돌아왔다. 그간 실증연구 결과를 깔끔하게 요약하면서, 똑부러지게 답하기 힘들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좀 더 자동화된 미래로 공정하게 나아가도록 하는 전략과 정책의 문제”라고 답했다. 네가 하기에 달린 문제를 왜 내게 묻느냐고 항변하는 듯했다.
인공지능은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로부터 배운다. 그런데 그런 인공지능을 개발한 인간들의 집합체인 사회는 여전히 학습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사회의 기억은 편의적이고 인간의 고집은 고래심줄이니, 우리의 현실은 도돌이표다. 그리고 오늘의 에켈뢰브는 여전히 수많은 바닥을 닦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