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도쿄 일본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전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박민희 | 논설위원
씁쓸한 모욕을 느꼈다.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은 ‘일본의 완승’을 ‘한-일 관계 미래지향적 개선’으로 포장하려는 무대였다.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 역사인식 계승”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반성을 지웠다. 윤 대통령이 한-일 간 모든 현안을 한꺼번에 놓고 주고받겠다고 공언해온 ‘그랜드 바겐’이 아니라, 일본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준 ‘그랜드 퍼주기’였다.
북핵, 대만해협 위기 등 안보 상황이 악화되고 미-중 패권 경쟁이 격해지며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현실에서 한·일의 협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여론을 절망하게 하고, 일본은 ‘한국이 약속을 잘 지키는지 보겠다’며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굴복 외교’의 허술한 토대 위에서 어떻게 한·일의 공정하고 안정적인 협력이 가능한가.
윤 대통령은 왜 막무가내로 돌진하는가. 한-일 관계의 민감성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당국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모들은 ‘최소한 일본의 사과는 있어야 한다’고 계속 제안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런 것은 낡은 한·일 인식’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조언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이 그토록 바라던 ‘더이상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한국’을 한국 대통령이 만들고자 한다.
한·일 과거사를 풀어야만 미국과 함께 갈 수 있다는 조바심도 원인이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에서 한·미·일 군사·경제안보 협력이 핵심인데, 한국이 여기 동참하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식으로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14일 니어재단 주최 세미나에서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윤 대통령이 ‘미국의 세력권 줄긋기에서 제외되면 생존의 위기에 빠진다’는 인식을 하면서 ‘극단적 도박의 수’를 던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런 식이라면 중국도 일본이 썼던 방식을 활용해 한국을 굴복시키려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 대통령의 ‘외교 사유화’도 더해졌다. 이번 일본 방문은 4월26일 미국 국빈방문을 향한 징검다리다. 대통령실과 외교부는 1월부터 한-미 정상회담 날짜를 잡는 데 힘을 쏟으면서,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을 들여왔다. 윤 대통령은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미 의회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그날을 꿈꾸고 있다. 윤 대통령은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대받으려 한다. 지지층에서 큰 점수를 딸 ‘역사적 장면’들을 보여주려면, 한-일 관계를 제대로 협상할 시간은 없었다.
‘대통령 돋보이기 외교’에 밀려, 정작 한국의 미래가 달린 현안에 대한 외교는 뒷전으로 밀린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대중국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하고, 지난달 28일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 내 생산 시설을 10년간 확장할 수 없고 영업 기밀도 내놔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공개했다. 3월7일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 날짜가 확정 발표된 이후에야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해 협의에 나섰다. 미국 정부 관료들과 의원들 사이에서도 “한국 정부가 반도체, 배터리에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이 강하게 요구하면 ‘타협’ 여지가 적지 않은데 왜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나”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자국 내에서 주요 전략물자를 자급하겠다며 보호주의를 거침없이 추진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인 유럽·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유럽연합은 미국 보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유럽 내에서 핵심 원자재와 부품을 조달해야 보조금을 주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만들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밀착하는 한편 ‘새 질서의 제정자’ 역할을 선점하려고 분주하다.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반도체 산업을 한국과 대만에 빼앗겼다고 여기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인다.
한국은 전세계 제조업 5위, 반도체·배터리 생산 1~2위, 대규모 군대와 방위산업을 가진 국가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기술 공급망을 재편하는 등 전략 목표를 실현하려면 한국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런 한국의 역량을 최대한 지렛대로 삼아 동맹에 쓴소리도 하고 치열하게 협상하고 주고받아야만 한국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우리가 먼저 굴복하면, 그 나라들이 알아서 호응해줄 것’이라는 환상으로 외교 협상 원칙과 역량을 허물고 있다. 한국의 미래를 훼손하면서, “나만 미래지향적”이라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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