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전하는 향연이든 크세노폰이 전하는 것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학술회의같이 분야별로 매우 전문적이며 경직된 틀의 심포지엄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터놓고 함께 술을 마시듯이 열린 마음으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며 삶의 질을 고양하는 자리였다. 고대 심포지엄의 전통은 중세에도 이어졌는데, 특히 중세 대학에서는 식탁 문화와 토론 능력의 밀접한 관계를 교육에 적극 활용했다.
김용석 | 철학자
오늘날 심포지엄이라는 단어에서는 학술적 냄새가 풍긴다. 사전에서도 ‘어떤 논제에 대해 두 사람 이상의 전문가가 각각 의견을 발표하고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토론회’라고 정의한다. 전문가들의 학술회의와 유사한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심피네인’, 곧 ‘함께(sym) 마시다(pinein)’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함께 마시는 일’을 명사로 ‘심포시온’이라고 했고 라틴어 표기 심포시움(symposium)을 거쳐, 그것의 영어 발음을 따른 심포지엄이 우리말 외래어가 되었다. 무엇을 함께 마시는지는 모두 짐작했으리라. 술을 함께 마신다. 당시나 지금이나 지중해 문화권에서 술은 포도주다.
이 말이 학술적 향기를 품게 된 데에는 <플라톤의 대화>편 ‘심포시온’이 한몫한 것 같다. 이 작품을 통상 ‘향연’(饗宴)이라고 번역하는데, ‘주연’(酒宴)이 어원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하긴 아주 유명한 고전에 후자의 제목을 붙이기 좀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비극 시인, 희극 작가, 수사학자, 의사 그리고 정치인 등 다양한 참석자들이 포도주를 마시면서 인생관과 세계관을 포함한 철학적 주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한다.
향연 또는 주연은 어느 문화권에도 있는 풍습이다. 다만 지역에 따라 각기 독특한 성격을 지닐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향연은 포도주라는 술과 서구 철학을 꽃피웠던 당대의 논리적이면서도 상상력 풍부한 담론이 특징이었다. 곧 음식의 향연뿐 아니라 말의 향연이 함께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진지한 토론을 부각하기 위해 연회석에서 악기 연주자들을 물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이 쓴 ‘향연’에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그런 사교 모임을 즐기는 모습이 좀 더 실제적으로 담겨 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우선 즐겁게 식사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익살꾼의 재담이 이어지고, 악기 연주가 뒤따른다. 사람들은 각자 어떤 일로 자부심을 갖게 되는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등을 토론한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로 분장한 무용수의 공연을 끝으로 향연을 마친다.
플라톤이 전하는 향연이든 크세노폰이 전하는 것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학술회의같이 분야별로 매우 전문적이며 경직된 틀의 심포지엄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터놓고 함께 술을 마시듯이 열린 마음으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며 삶의 질을 고양하는 자리였다.
고대 심포지엄의 전통은 중세에도 이어졌는데, 특히 중세 대학에서는 식탁 문화와 토론 능력의 밀접한 관계를 교육에 적극 활용했다. 이는 중세 때 설립된 대학들, 예를 들어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등에서 만찬을 하는 홀(Hall)이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상의 심포지엄’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이 자연스레 대화와 토론에 익숙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대화와 토론 문화는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표현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소통 능력을 키워주며, 나아가 사회에 진출하면 그 문화 자체가 공적 활동을 위한 자질이 된다.
고전적 의미의 심포지엄은 근현대 역사에서도 일상의 좋은 전통에 관심 있는 학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런 전통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삶의 바탕이 된다. 칸트는 ‘인간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복된 삶’을 논했는데, 그것은 거창한 이념도 형이상학적 원리도 아닌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식사’를 하는 삶이었다. 여기서 좋은 사람들이란 소통하며 어울릴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의 상대들이다.
칸트는 식탁에 함께할 사람이 몇명이면 좋을지 아주 실용적인 조언도 한다. 이는 심포지엄에서 중요한 대화와 토론의 효율성을 위해서다. 최소 인원은 ‘삼미신의 숫자’는 돼야 하고, 최대 인원은 ‘뮤즈의 숫자’를 넘지 않는 게 좋다. 우선 최소 인원이 세명은 돼야 좋다. 셋 미만, 즉 둘이라면 대화가 끊겨 ‘참기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뮤즈의 숫자, 즉 아홉을 넘을 경우는 오늘날 우리도 경험하듯이 대화 그룹이 삼삼오오 나뉠 가능성이 있어 좋지 않다. 한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면 조화로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재미있고 의미 있게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쓴 칸트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언급하며 말한다. “이런 향연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을 즐길 뿐만 아니라,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다.”
언급했듯이 오늘날에는 심포지엄의 의미가 너무 무거워졌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토론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각 분야에서 심포지엄의 원래 의미를 회복해서 활용하면 사회·문화적으로 훌륭한 소통의 윤활유가 될 것 같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대화와 소통 능력은 항상 미심쩍기 때문이다. 취임 때부터 소통을 매우 중요시했던 현직 대통령은 ‘만찬 정치’를 적극 활용한다고 한다. 좋은 접근법이다. 그것은 공인이 하는 일종의 심포지엄이라고 할 수 있다. 술 마시고 밥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국정에 도움이 되는 진지한 토론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꼭 염두에 둬야 할 원칙이 있다. 칸트는 사사로운 향연도 “되도록 상대를 바꿔가면서” 하라고 조언했다. 공적 심포지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자기편의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편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공사 구분 못 하는 게 된다. 웬 논리 비약이냐고?
그렇지 않다. 저명한 보수주의 정치학자 케네스 미노그는 절대권력자가 마음먹은 대로 통치할 수 있는 전제주의와 달리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것은 사적 행태다. 어떤 개인이든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공인에게 이건 선택이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공적 의무다. 국민 세금을 쓰는 공인의 심포지엄은 그 값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