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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국책연구소 “부처의 시녀” 자조…‘99년 체제’ 넘으려면

등록 2023-02-21 17:41수정 2023-02-22 02:33

[이창곤의 정담] 18 _싱크탱크2
일선 연구자들의 생각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는 결이 다르다. 다수 연구자가 국책연구소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선 예산과 운영 면에서 정부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이 더 보장돼야 한다고 본다. 국책연구소들이 국무조정실 산하 연구회 소속으로 재편됐지만, 여전히 부처가 원하는 연구를 하는 하청기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8월 서울 여의도 하우스카페에서 열린 청년 싱크탱크 ‘상상23 오픈 세미나’에 당시 대선후보 자격으로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8월 서울 여의도 하우스카페에서 열린 청년 싱크탱크 ‘상상23 오픈 세미나’에 당시 대선후보 자격으로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래 산업전략은 누가 짜는가? KDI(한국개발연구원)도 아니고, 삼성이나 대기업의 경제연구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회 단위 연구역량이 지원하는 것 같지 않고, 정당 연구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사회의 역량도 잘 발휘되지 못한다. 결국 관료들이나 보이지 않는 집단들에 의해 좌우되는 위험한 상황으로 가는 것 아닌가?”

노광표 한국고용노동교육원장이 ‘국책연구기관 발전을 위한 연구역량 강화방안 보고서’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 싱크탱크들이 제구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연구자들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책연구기관이나 대학 등 공공분야 이외에도 민간, 언론, 정당 연구소 모두에게 정책생산자 역할을 요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정책위원장)

한때 신선한 대안을 제시하며 획기적인 정책 변화를 끌어내기도 했던 시민사회 싱크탱크는 이제는 ‘의제제기자’로서 역할에 그친다. 뜻과 의지는 크나, 그에 걸맞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추지 못해 “역량이 부족하다.”(노광표) 대학 부설 연구소들은 “정부 등 외부 연구용역을 따내기 위한 곳으로 기능할 뿐” “상당수가 상근인력 없는 이름만 연구소”(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기업연구소는 “(정책) 공론장에서 사실상 빠져버린”(김병권 전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장)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싱크탱크로서 의미 있는 정책생산 활동을 하는 곳은 사실상 국책연구소 정도 말고는 없다는 자조도 나온다. 이처럼 정책생산자가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수렴되는 ‘싱크탱크 단종화’ 현상은 국내 정책지식생태계의 심각한 고장 신호다. 무릇 좋은 정책은 여러 연구기관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분출해 경합하고 상호검증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생산자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책연구소에 대한 불만도 어느 때보다 크다.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문제 같은 새 의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노광표)” 데다, “개별 의제, 부처 영역에만 몰입돼 있다”(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지적이 많다. “신뢰와 의존도가 점차 줄어드는” 흐름인 만큼 “스스로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김병권)는 주문도 나온다.

하지만 가파르게 성장해온 국내 싱크탱크들의 다양한 활동을 보노라면, 전문가들의 혹평은 현실과 배치되거나 편향적이고 자학적이란 반론이 나올 수 있을 법하다. 대한민국 싱크탱크는 최근 20년가량 양적으로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싱크탱크는 개발독재 시대 국책연구기관만이 존재했던 1970년대 1세대, 다양한 민간분야 연구소가 속속 등장한 80~90년대 2세대를 거쳐 바야흐로 정당과 기업, 시민사회, 대학, 지방정부 그리고 언론까지 가세한 현재의 ‘싱크탱크 3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압도적 역량을 발휘하는 곳은 물론 국책연구소, 즉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국책연구소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26곳)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25곳)로 나뉘어 속해 있다. 두 연구회 말고도 행정부처 직할 기관도 적잖다. 이들 연구기관이 해마다 쏟아내는 보고서와 자료는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하루가 멀게 각종 세미나와 포럼도 열린다. 이들 기관이 생산해낸 콘텐츠는 정부의 정책 발굴과 국가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싱크탱크 역할에는 왜 강한 의문이 제기될까. 설명한 대로 활동이 빈약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싱크탱크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는 물음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해서가 아닐까. 사람이나 조직이나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흔히 싱크탱크의 역할로 세가지를 꼽는다. 당대 사회문제를 풀 해법으로서 정책생산 및 연구가 첫째이고, 개발한 정책을 제공하거나 자문하는 일이 둘째다. 마지막으로 다가올 사회적 위험을 살펴 국가나 공동체의 중장기 미래를 조망하는 비전연구가 셋째다. 싱크탱크의 이런 역할이야말로 기관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국내 싱크탱크들은 앞서 전문가들의 진단대로 시민이 겪는 절박한 문제를 풀 새로운 대안(정책)을 생산하는데 미흡하고, 비전연구는 숫제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4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스스로 “대한민국 싱크탱크는 글로벌한 경쟁상황과 복잡해진 정책환경에 대응하기에 미흡했다”(<미래 국가정책 선도를 위한 글로벌 싱크탱크 현황과 시사점>고 진단한 바 있다.

게다가 현재 대한민국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복합위험의 불확실성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저출생고령화와 불평등·양극화의 심화,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미·중 갈등에 따른 국제관계 변화 등 숱한 위험이 복합적으로 우리를 휩싸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의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정책 대안과 중장기 미래 비전 마련이 긴요하다. 국책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싱크탱크들은 그 역할을 얼마나 효과적이고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현 국책연구기관 시스템을 ‘99년 체제’로 부른다. 국책연구소가 개별 부처 소속에서 1999년 지금의 총리실 산하 연구회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연구회는 현재 ‘99년 연구회 체제를 넘어’란 구호 아래 나름의 변화를 모색 중이다.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들을 탐색하는 한편, 싱크탱크의 글로벌화와 융합연구 확대 등을 주창한다. 하지만 수억원 예산에 매머드급 연구인력이 투입되는 몇몇 융합연구는 사실상 짜깁기 연구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일선 연구자들의 생각은 연구회와는 결이 다르다. 다수 연구자가 국책연구소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선 예산과 운영 면에서 정부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이 더 보장돼야 한다고 본다. 국책연구소들이 국무조정실 산하 연구회 소속으로 재편됐지만, 여전히 부처가 원하는 연구를 하는 정책 하청기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책기관 한 선임연구위원은 “언젠가부터 (집권 세력이) 의제를 브랜드화하거나 답을 정해놓고 이를 ‘내리꽂아’ 정당화하는 연구를 주문하는 이른바 ‘연구의 정치화 현상’이 심각하다”며 “문제 자체에서 연구가 출발할 수 있도록 연구 결정 과정이 투명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투명성과 개방성은 연구회가 강조하는 융합연구가 실질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도 중요한 대목이다. 연구의 첫 시작 때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연구자들의 협업이 가능하려면 열린 연구시스템과 개방적 네트워크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좀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재 영역별로 행정부처보다 더 잘게 쪼개져 있는 국책연구소의 과감한 통폐합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더는 “부처의 시녀가 아닌 정권과 무관하게 미래를 그려내는 국가 싱크탱크, 즉 거시적·통합적·장기적 국가비전 수립을 위한 범정권·범부처 싱크탱크가 필요하다”(황윤원 중원대 총장)는 주장도 귀담아들어 볼 만하다.

정부출연기관법 제1조는 ‘합리적인 국가연구체제의 구축’을 이 법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합리적인 국가연구체제가 집권세력을 위한 연구기관 시스템을 뜻하지는 않을 테다. 또한 제대로 된 정책연구를 반드시 국책연구소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국가연구체제 구축에 더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여러 자리에서 “국책연구소는 시민사회 싱크탱크와 동반 성장하는 전략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창한 바 있다. 국책연구소는 민간 싱크탱크들과 협업하면서 발랄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수혈하는 한편 시민사회 싱크탱크가 성장하도록 돕는 조언자 역할을 해 대한민국 정책생태계 전체의 역량을 키워나갈 책무가 있다. 한 국책연구소의 선임연구위원 말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연구자로서 제발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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