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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통일은 도둑처럼 오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등록 2023-02-19 18:08수정 2023-02-20 02:38

시대 변화를 고려하는 새로운 통일론이 필요하다.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으며,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곧 통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통일부·행정안전부·보훈처·인사혁신처 새해 업무보고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통일부·행정안전부·보훈처·인사혁신처 새해 업무보고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흡수통일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를 들으니, 다시 적대의 시간이 왔음을 알겠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교류와 협력을 말하고, 통일의 과정을 중시한다. 남북관계가 안 좋을 때는 반대로 통일의 결과를 앞세워 ‘현재 정책의 실패’를 감춘다. 특히 흡수통일론은 대북 적대 선언이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 항아리’나, 박근혜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는 ‘도둑처럼 올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윤석열 정부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과연 흡수통일이 가능할까?

독일 통일의 사례를 들어, 흡수통일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에서 흡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사민당 정부나 통일의 과정을 주도했던 기민당 정부 모두 통일을 강조한 적이 없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통일 조약이 맺어지는 순간까지 서독 정부는 급작스러운 통일의 후유증을 완화할 수 있는 단계적인 통일 방안을 선호했다. 통일은 서독의 흡수 의지가 아니라, 동독 주민들의 민주적 투표 결과였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물리력으로 흡수하겠다는 것은 폭력이다. ‘평화적 흡수통일론’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그 말은 ‘뜨거운 얼음’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흡수의 의도는 상대에게 위협이고, 적대적 의존의 명분이며, 결과적으로 권위적인 체제 유지의 기반을 제공한다. 흡수를 말할수록 통일은 멀어진다. 만약에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흡수의 의도를 드러냈다면, 동독 주민들 역시 통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 체제의 불안을 근거로 흡수의 가능성을 거론하는 의견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화하듯이, 북한의 권위적 정치체제도 변화할 수 있다. 다만 경제가 어려워서 정치가 무너진 사례는 드물다. 나아가 북한 정치의 변화와 흡수통일 사이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분단국가인 예멘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도 다른 쪽으로의 흡수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이 쿠데타 세력의 권력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이 도둑처럼 온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흡수통일은 가장 비싼 통일비용이 드는 통일 방안이다. 일반적으로 통일비용이란 북한의 소득과 남한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비용이다. 당연히 남북한의 소득격차가 클수록 통일비용이 많이 들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통일비용을 줄이려면 단계적으로 협력의 수준을 높여서 소득격차를 줄이고, 통합의 기반을 넓혀가야 한다.

왜 젊은 세대가 통일을 반대할까? 통일이 가져올 이득이 아니라, 부담만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통일을 유토피아로 상상했지만, 최근의 소설과 영화는 통일 이후를 부패와 폭력이 난무하는 디스토피아로 그린다. 통일을 서두르다, ‘국가 붕괴’로 이어진 예멘의 사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멘은 전쟁으로 통일을 했을 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한과 복수가 반복되는,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의 세계는 분단보다 못한 비극이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이미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때의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은 초당적 합의로 가능했다. 이후 지난 30여년의 세월 동안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핵심 내용은 그대로다. 통일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갑자기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그리고 상처를 덧내지 말고 상처를 치유하면서 추진해야 한다는 점이 국민적 합의다.

시대 변화를 고려하는 새로운 통일론이 필요하다. ‘중립화 통일론’은 대한민국의 달라진 국력과 어울리지 않고, ‘두 개 국가론’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민족 담론으로는 젊은 세대를 설득하기 어렵고, 핵을 가진 북한과 ‘남북 연합’을 논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화해와 공존의 통일론이 필요하다.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으며,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곧 통일이다.

남북통일 이전에, ‘우리 안의 통일’도 중요하다. 대체로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상대를 인정하고, 제도 안에서 경쟁하며,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살아야, 흡수통일론이 강조하는 ‘결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다. 통일은 도둑처럼 오지 않는다. 농부의 마음으로 땀을 흘려야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의 환상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현실을 극복하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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