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영 용산구청장이 지난 11월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답변을 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앞쪽 오른쪽부터 오세훈 서울시장,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어릴 때 인기있던 드라마는 <전설의 고향>이었다. 소복을 입은 귀신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한밤중에 사또 앞에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사또들은 귀신이 입도 열기 전에 기절해 버렸다. 여러번의 실패 끝에 어느 용감한 이가 사또가 되면서 귀신은 마침내 제대로 하소연할 수 있었고, 한을 풀게 되는 전설이 종종 나왔다. 귀신이 나오면 무서워 고개를 돌렸지만 어린 맘에도 좀 궁금했다. 귀신들은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그냥 화끈하게 복수하지, 저리 답답하게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걸까.
궁금함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 이 세상에 귀신이란 없구나’로 바뀌었다. 5·18 희생자들에게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다 죽은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옛 어른들이 “귀신은 뭐하노, 저놈 안 잡아가고”라고 한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다 근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귀신이 원한 건 복수가 아니지 않을까. 억울한 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가 감춰지는 게 아니었을까. 산 자가 저지른 악행의 진상이 밝혀지려면 죽은 자의 진술로는 어림도 없다. 산 사람이 산 사람을 조사해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되니까. 그래서 조사의 권한을 가진 사또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귀신이 사또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로 유명한 건 <장화홍련전>이다. 고전소설로 알려졌지만 1656년에 평안도 철선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다. 조선 효종 때였다. 정동흘이란 무관이 철산부사로 부임했는데 마을에 두자매가 연이어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큰 언니인 장화는 품행이 방정하지 않아 혼인도 하기 전에 낙태했고, 이런 사실이 소문날까 두려워 연못에 뛰어들었다. 언니를 잃은 슬픔에 잠긴 동생 홍련도 뒤를 따라 자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정동흘은 뭔가 석연치 않다고 느껴 자세한 재수사를 명한다. 검시를 통해 장화는 임신한 적이 없음이 밝혀졌고, 그 부모와 형제를 불러 심문한 결과 이들이 두자매를 살해한 정황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 일이 사람들에게 구전돼 내려오면서 장화와 홍련이 귀신이 되어 사또를 찾아가는 설정으로 바뀐 것이다. 그냥 묻히고 지나갈 일을 사또가 굳이 재조사할 강력한 계기가 필요하니까.
장화홍련과 유사한 얼개를 가진 이야기로 경상남도 밀양이 배경인 ‘아랑’ 전설이 있다. 아랑은 강간범에게 살해당해 땅에 묻혔지만 사람들은 양반집 처녀가 바람이 나서 가출한 것으로만 알았다. 아랑은 귀신이 되어 사또를 찾아갔고, 사또가 범인도 잡고 아랑의 주검도 찾아 장례를 치러준다는 내용이다. 아랑의 삶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온전히 애도 받으려면 무엇보다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아랑이나 장화와 홍련이 바란 건 복수가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온 세상이 똑바로 알고, 자신과 같은 일이 다시 생겨나지 않도록 애써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귀신이 사또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과거 사또가 하던 역할을 맡은 곳은 검찰, 경찰, 국회, 지자체 등 더 많아졌다. 하지만 가끔 이들이 범인일 때가 있다. 이태원 참사에 아직 정부는 진심어린 사과 한번 없다. 국정조사특별위원회도 믿을 만하지 않다. 그럼 이 시대의 귀신은 어딜 찾아가야 할까. 물론, 귀신이 있길 바라지 않는다. 돌아가신 분들이 모두 평안하시길 바랄 뿐. 어차피 산 사람들이 풀어야 할 일이다.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진상을 밝히고 애도하고 추모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옛날 용감한 사또 역할을 맡으면 된다. 유난히 가슴 아픈 일이 많았던 2022년이 저물고 새해가 뜬다. 2023년을 시작하는 하나의 문장은 이것으로 삼자. ‘기억하겠습니다.’
기억의 힘으로 진상을 조사하고, 기억의 힘으로 추모해 부디 다른 죽음들을 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