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나눔의집협의회 주최로 25일 오전 서울 용산구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추모와 연대의 성탄절 연합 성찬례가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겨레 프리즘] 정환봉 | 탐사기획팀장 겸 소통데스크
수도권과 중부지방 최저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돌던 지난 22일, 기차를 탔다. 아침 7시 출발하는 서울발 부산행 케이티엑스(KTX). 열차 안에서도 곱은 손가락이 풀릴 줄 몰랐다. 기차가 남쪽으로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객실에 온기가 쌓였다. 마침내 도착한 부산의 기온은 영상 2.3도. 따뜻한 도시였다. 하지만 남쪽 도시의 모든 이에게 온기가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슬픔이 시퍼런 한기가 되어 하루도 따뜻할 수 없는 이들을 만났다. 이태원 참사에서 아들과 딸을 잃은 어머니들이었다.
“그날 내가 아이 집에 갔어야 했어요.” “내가 그날 부산에 오라고 해야 했는데….”
2022년 10월29일. 그날을 되돌릴 수 없을까. 수만번의 생각이 다다른 곳은 자책이었다. 아무런 잘못 없는 부모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위로는 부질없었다.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참사 이후 두달이 다 돼간다. 곧 해가 바뀐다. 하지만 이 비극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는 이도 없다. 비현실적인 슬픔은 기댈 곳을 잃었다. 세상에 소리를 질러도 답이 없으니, 자신을 탓해서라도 이 비극을 이해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생과 사를 가른 것은 잘못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파에 떠밀려 참사가 발생한 골목으로 들어간 이들은 희생을 당했다. 일행 중에서도 다른 골목으로 휩쓸린 사람들은 살았다. 희생자들은 간식을 사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바람을 잠시 쐬려다가 생명을 잃었다. 오래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위험이었지만 정부도, 지자체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날 낮부터 경찰 등에 신고가 이어졌지만, 제대로 된 대응은 없었다. 참사 책임은 희생자도, 부모도 아닌 정부에 있다.
워낙 법률가로 가득한 정부라 책임의 비율을 따지고 싶은 이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국회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자 대통령실은 지난 12일 그의 거취는 “진상이 명확히 가려진 후에 판단할 문제”라고 밝혔다. 이 장관이 책임져야 할 몫을 따져보자는 뜻으로 들린다. 그의 변호인이 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셈법으로는 참사를 영원히 책임질 수 없다. 이태원 참사에 슬퍼하는 시민들은 애도로 이 비극의 책임을 나누고 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 리 없지만,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참혹한 골목에 머물며 심폐소생술을 했던 시민과 현장 경찰, 소방관, 의료진은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 때문에 우리 사회의 통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극을 두고 많은 이들이 책임감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
어쩌면 우리는 조만간 이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태원 참사의 법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기소 여부를 셈하고 수사나 재판에서 빌미가 잡힐 말은 하지 않을 정도로 유능한 이들이 이번 정부에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로 가득한 정부가 좋은 정부일 수는 없다. 슬픔은 마땅히 기댈 곳을 찾지 못하면 분노가 된다. 가족을 잃은 유족과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시민의 분노는 경찰 수사나 검찰 기소처럼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가족들이에요. 그런데 납득이 안 되잖아요.” 추운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이 필 것이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은 그 당연한 계절의 변화를 함께했던 이를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잃었다. 하루 만에 158개의 세계가 무너졌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그 폐허에서 혼자 살아남을 궁리만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이태원에서 봄을 기대할 수 없다. 부디 지금이라도 정부가 인간의 온기를 가지고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길 빌어본다. 새해 소망은 이것으로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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