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끝자락, 인도 수도 뉴델리의 한 상가 앞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뉴델리/연합뉴스
[전명윤의 환상타파]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3년 만에 인도에 머물고 있다. 정확히 2020년 2월 이후니까 2년10개월 만이다. 그사이 세계는 코로나를 겪었고, 인도는 한국언론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의 대명사로 취급되며 두들겨 맞았다.
지금 와 따진다면 인도는 꽤 우수한 성적으로 코로나를 극복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인도는 실내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비록 나는 악명높은 델리의 대기오염 때문에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쓰긴 하지만, 인도인에게는 그저 민감한 외국인으로 보일 뿐이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했는데, 비행기가 인도에 도착한 즉시 마스크 의무는 해제됐다. 국경을 넘고 나라가 바뀌면 말과 인종, 화폐가 바뀌는 경험은 여태껏 해왔지만, 마스크의 착용 여부가 바뀌는 풍경은 처음인지라 꽤 신선했다.
입국심사 때도, 검역소와 입국 면세점을 지날 때도 마스크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외 마스크 의무가 해제됐음에도 기어코 마스크를 꾹꾹 눌러쓰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모두가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신기한 세상이다.
1996년 이 나라와 인연을 맺은 뒤 3년씩이나 이별해본 적이 없었던데다 직업병까지 도져, 취재여행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자연스레 내가 아는 거리와 골목,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델리 입국 즉시 짐을 풀자마자 찾아가던 라시(인도식 마시는 요거트) 집은 사라져버렸다.
주변 상인들에게 탐문해보니 주인장이 코로나로 죽었단다. 한국에 갇혀있는 내내 인도에서 알고 지내던 노인들 생사가 걱정되긴 했다. 딱히 연락처까지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 도시를 방문하면 너 또 왔니? 정도의 표정으로 반가움이 스치던 거리의 사람들 안부가 궁금했는데, 첫번째 부음의 주인공은 젊은 라시 장사꾼이었다. 원래 아버지와 아들이 하던 가게였는데, 아버지가 죽고, 10대의 아들이 어렵사리 가게를 이어받았더랬다. 3년 전에는 수염까지 제법 자라 총각티가 나던, 죽은 주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스팟 호텔의 매니저 라메쉬는 2020년 4~5월 첫번째 락다운이 있던 시기 델리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락다운 즉시 해고됐고, 살기 위해서는 고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그는 끝없는 행렬을 따라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는 카슈미르 게이트로 가 이틀 밤을 꼬박 굶으면서 샜다고 했다. 하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고, 그렇게 망설이던 사이 이틀 전 평소 시세의 3배였던 합승 택시 값은 20배 가까이 뛰었다고.
낙심한 채, 델리의 거주지로 돌아가던 중, 다르야간즈에서 고향 사람들이 전세 낸 택시를 우연히 만나 그 차에 끼여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향에서 2년. 다시 호텔로 돌아온 지는 서너달 되었다고.
그는 차이(인도식 밀크티)를 권했다. 예전이라면 거절했겠지만, 그 날은 고맙다며 받아마셨다. 코로나 시기 서로가 살아낸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나를 여행안내서 작가로 대하지 않음이 느껴졌다. 그와 알고 지낸 지 얼추 20년이다. 여행안내서 작가는 신분이 드러나는 즉시 온갖 환대와 마주해야 하기에 호감을 감춘 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를 대해 왔다. 다시 못 볼뻔한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같은 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이들끼리 느낄 법한 묘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와 포옹하고 헤어졌다가 다시 돌아가 사진 한장 찍자고 했다. 코로나 이전이었다면 그 사진이 어찌 쓰일지 모른다고 경계하며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내가 나서서 하자고 했다. 지난해던가 인도 지인들 얼굴이 보고 싶은데 수중에 사진 한장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인도 사진은 14만장이 있는데, 죄다 유적지의 돌멩이 사진이랑 요리 사진, 객실 사진뿐이었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그도, 나도 꽤 늙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에겐 고작 3년이었을지 모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3년이었다. 많이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매일 이 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누비며 아는 얼굴마다 인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