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화물안전운임제 사수! 노조파괴 윤석열 정부 규탄! 국민안전 외면 국회 규탄! 공공운수노조 결의대회’를 열었다. 채윤태 기자
[세상읽기]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있는 집을 빌렸다. 코로나 3년 동안 잠자던 앱을 구동시켜 생애 최고가 1박을 했다. 먼 데서 오신 어른 덕에 누린 호사다. 태양은 날씨 앱이 예고한 시각에 정확히 바다를 주홍으로 물들이며 가라앉았다. 거실에서 찍은 사진 속으로 그 집의 돈값도 박제되었다.
북태평양 대게로 찌개를 해 먹고 내 집에서는 지구를 살린다는 명분까지 붙이며 안 쓰던 식기세척기를 돌려 나의 노동시간을 줄였다. 다음날 아침에도 욕조 가득 더운 물을 채웠고, 모두가 막바지 바다 풍광을 누리러 방방 침대에 붙어 있을 때, 나는 추가요금이 무서워 집을 살폈다. 이미 청소료 200달러를 낸 곳이다. 현관을 열자 라면봉지가 날아왔다. 데크 위로 뭉개진 쑥갓과 조각난 게 껍질이 눌어붙어 있었다. 울타리에 막혀 사슴은 들어오지 못했으나 담을 타넘는 무언가가 쓰레기 봉지를 헤집었나 보다.
갓난아이 손톱만한 잔해까지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치웠다. 호스 수압을 높여 얼룩까지 지우고 또 지웠다. 아름다운 바다가 눈앞에 있으니 우아한 물청소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굽은 허리가 굳어갈수록 경치는 투명해졌고, 요통은 시각정보를 게찌개 얼룩으로 집중시켰다. 오직 청소, 슈퍼 고객 평점을 유지하려 바닷가 따라 한시간 거리에 있는 플랫폼 본사를 의식하며 퇴실 시각까지 박박 문질렀다. 문득 이 집을 청소하러 오는 이들에게 이 경치가 주는 마법은 몇분일까 궁금해졌다. 하루에 예닐곱 집을 치워야만 21세기 인간의 존엄을 유지한다면 그저 한시간에 끝내야 할 목표일 텐데….
아이티 혁명이라는 힘찬 나발 속에서 디지털 산업은 자본주의의 체질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경제의 본질은 그대로다. 노동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상품을 만들고 배달하는 이가 존재해야만 한다. 키오스크에서 결제하면 본사의 지령 속에서 광고 이미지와 같은 식판이 어디 먼 곳에서 올 것 같지만, 그 주문은 형광 패널 뒤 주방으로 전달된다. 그곳의 식재료 상태 고스란히 레시피 표준 범주 언저리에서 조리될 뿐이다. 또 하나 여전한 것이 있다. 경제는 언제나 위기 혹은 위기 신호 속에 있다는 점이다. 1997년 이후부터 위기의 최상급 기준은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되었다. 당시 60살이었던 울 어머니는 ‘6·25도 넘어왔는데 이까짓 거’라고 말했다. 견뎌내겠다는 다짐이었지만, 실상은 집과 소득, 자산이 있고 지병이 없었기에 건넌 것이다.
위기는 없이 사는 곳으로 몰아친다. 얄팍한 주머니부터 거덜 나기에 토대가 있는 삶은 끄떡없다. 그리고 자산이 많은 곳부터 기회로 둔갑했다. 코로나19가 디지털 산업 호황으로 주식 부자를 출현시켰듯, 아이엠에프 사태도 누군가에게는 숙원 풀이 기회였다. 2019년에 경제학자 장하준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해고도, 구조조정도 쉽게 하는 시장주의를 퍼뜨려야 하는데 노동계, 시민단체에서 반대해서 못 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라고 한 대사를 인용하며 당시 아이엠에프는 저항할 줄 알았는데 투항해서 깜짝 놀랐다더라고 말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 글로벌 스탠더드인 불평등을 착장하였다. 15년 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요구가 대선 이슈로까지 올라왔고, 코로나19로 잊힌 숙제가 되었다.
화물연대가 파업을 풀었다. 그들이 운전대를 놓자 정부는 경제 마비라며, 그들을 한국 경제의 기둥으로 띄우면서 국가를 위기로 내몬 폭도로 고꾸라뜨렸다. 3년 전, 코로나19 속에서 생산 유통 서비스 노동자들 역시 경제의 주역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이들을 ‘영웅’이라 했고, 영웅 수당을 주자는 지방정부까지 나왔다. 우리는 위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은 코로나 막바지에 우리 시대를 디지털 자본주의라 규정하며 이렇게 조언했다. ‘우리는 지금 위험 요소를 감수하지 않는 자본주의를 가지고 있다. 위험은 고스란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떠넘겨진다. 19세기 초, 사회적 권리가 없던 노동자들처럼 그때의 게임 규칙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 두세기에 걸쳐 산업과 사회를 문명화했던 그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안전운임제마저도 3년 연장이 아닌 폐기를 넘보고 있고, 노동계 전반을 압박하며 법인세는 감세하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친기업이라기보다 친불평등 정권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있는 안전망까지 들어내며 밥그릇을 담보로 모두의 안전을 걷어차려 한다. 불평등이 심화하면 사회의 우울은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