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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헌의 바깥길]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

등록 2022-12-13 19:50수정 2022-12-13 20:14

많은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이나 조직이 있으면, 마땅히 그 이익은 사회적으로 나누도록 조처해야 한다. 이렇게 마련된 재원은 저소득층 생계비 안정에 사용하면 된다. 특히 에너지 기업을 비롯해 최근 사상 최대의 이윤을 올린 기업들에는 ‘초과이윤세’(또는 횡재세)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실질임금이 감소했다. 임금이 명목상 올랐지만, 물가상승률에 턱없이 미치지 못해 임금이 실질적으로는 줄었다.

얼마 전에 발표된 세계임금보고서에 따르면, 실질임금은 세계 전체적으로 0.9% 줄었다. 그간 세계임금의 성장을 주도했던 중국을 제외하고 계산하면, 감소 폭은 1.4%로 늘어난다. 지난 20년간 임금 수준을 놓고 말도 많고 탓도 많았지만, 실질임금은 그래도 평균 2% 남짓 올랐다. 세계 금융위기로 모든 경제가 어려웠던 2008~2009년에도 실질임금은 1% 정도 늘어났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빈사 상태에 빠졌던 지난 몇년 사이에도 정부의 대대적인 임금 관련 지원 덕에 일을 적게 하고도 노동소득은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질임금의 하락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다.

경제가 어려워서 전체소득이 줄어들 때 임금도 쪼그라드는 것은 아프지만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향후 전망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세계지정학적인 불안도 커지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경제 성장세를 계속 이어왔다. 국제통화기금은 올해 세계경제가 3% 정도 성장할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 노동이 기여한 몫이 적지 않았다. 물가요인을 제거한 실질노동생산성을 보면,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지난 몇년간 주춤하다가 올해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즉, 실질노동생산성은 증가했는데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다. 노동자들이 기여한 것은 늘고 받는 것은 줄었다는 뜻이다.

물론 임금과 노동생산성의 격차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임금 성장은 노동생산성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렇게 누적된 격차가 소득 불평등 확대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는 상승 폭의 차이가 문제였다. 올해처럼 노동생산성은 늘고 임금은 줄어드는, 방향의 차이는 아니었다. 그 결과, 노동생산성과 임금의 격차는 2000년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늘었다. 아직 구체적인 추정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기업의 이윤 몫은 큰 규모로 늘었을 것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수치들도 ‘평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분리와 분열의 시대다. 코로나 방역 시절에 이미 겪었던 일이다. 고임금 직종은 고용 안정과 소득 상승을 누렸던 반면 고용·소득 손실은 저임금 저소득층에 집중되었던 탓에, 수많은 국가에서 지난 몇년 동안 임금·소득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지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물가 상승이 월급봉투에 미치는 영향이 같지 않다. 예컨대, 현재 식료품이나 에너지 부문에서 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런 품목에 대한 저소득층의 지출 비중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이 특히 그렇다. 예컨대, 멕시코에서 최하위소득층의 식료품 지출 비중은 40%가 넘지만, 최상위소득층에서 이 비율은 3분의 1 수준이다. 이런 까닭에 하위소득층이 겪는 물가 상승의 실질적 타격은 더 크다. 최근 추정한 바로는 지금 물가상승률이 6%라면, 하위소득층이 실질적으로 겪는 물가상승률은 10% 정도 된다고 한다. 결국 저임금 저소득층이 겪는 손실은 중첩적이다.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돈으로 더 비싼 값을 치른다.

“초유의 사태”에는 응당 과감하고 신속한 “초유의 대책”이 필요하지만, 이 또한 녹록지 않다. 우선, 개별적·단체적 방법을 통한 임금협상.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일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가장 제한적인 방식이다.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교섭력이 허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의 거시 정책은 임금 인상에 대해 원색적인 경고장을 던지고 있고 이에 따라 기업들의 태도는 더 완강해졌다. 임금협상의 환경이 두드러지게 나빠졌다. 게다가 이런 제한적인 임금협상 기회도 저임금 저소득층에는 그저 ‘꿈같은 기회’일 뿐이고, 능력 있는 노조들의 연대와 도움의 손길도 좀체 보이지 않는다.

임금협상이 어려운 저임금층을 위한 최저임금은 어떤가. 역시 쉽지 않다. 많은 국가에서 최저임금은 계속 조정되고 있긴 하지만, 물가 인상 속도에 한참 밀려 있다. 최저임금에 특히 목소리를 높였던 미국과 영국에서도 지난 2~3년 동안 최저임금의 구매력은 줄었다. 영국에서 실질최저임금은 4%가량 하락했고, 미국에서는 하락 규모가 이보다 두배 이상이다.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이 최소한 물가상승률만큼은 올라야 한다는 원칙을 그동안 고수해왔지만, 두자릿수를 넘나드는 물가 상승 폭에 난감해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는 노동자들, 특히 저임금 저소득자들의 생계비 안정을 위한 정책이 절실하다. 이것 없이는 효과적인 임금협상과 최저임금 조정은 사실상 어렵다. 공공재 성격이 강한 에너지 부문에서는 가격 개입이 필수불가결하다. “가격 결정은 오로지 시장에서”라는 청교도적 방식은 서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삼을 위험이 크고, 최근 유럽의 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야 소비가 줄어서 궁극적인 안정을 찾는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가격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이에 따른 “소비 축소”는 저소득층에는 단순한 소비구성 조정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불가피하게 가격 조정을 해야 한다면, 이들을 위한 소득 지원책도 같이 뒤따라야 한다. 식료품도 마찬가지다. 유럽 국가들이 식료품과 에너지를 비롯한 필수재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과감하게 인하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이나 조직이 있으면, 마땅히 그 이익은 사회적으로 나누도록 조처해야 한다. 이렇게 마련된 재원은 저소득층 생계비 안정에 사용하면 된다. 특히 에너지 기업을 비롯해 최근 사상 최대의 이윤을 올린 기업들에는 ‘초과이윤세’(또는 횡재세)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기술적 어려움을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실제로는 기업과 전문가들의 본능적 이해관계와 거부감이 더 큰 이유다. 이제껏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새로운 현실에 대해 새로운 해법을 찾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거시 통화정책도 변해야 한다. 임금이 올라 물가가 상승하는 악순환을 막자고, 통화정책을 거칠게 운용해왔다. 하지만 악순환의 증거는 없고, 물가 안정은 더디고, 경제 침체의 징후만 커졌다. 그 고통은 다시 한번 온전히 중하층 노동계층에 전가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속으로는 실질임금 하락을 환영하는 정책당국자와 기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며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타박하고 윽박지르며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책 실패의 첫걸음이다. 불확실성으로 꽉 찬 노동의 역사에서 이것 하나만은 모두가 아프게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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