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삼성 여성 사장의 빛과 그림자 [김영희 칼럼]

등록 2022-12-12 13:05수정 2023-01-05 18:07

몇년 전부터 두드러진 여성 임원들 약진에선 기술직 공채거나 해외 유학에 외국계 마케팅 회사에서 능력을 키운 인물이라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요즘 같은 능력주의와 대이직 시대에 첫 직장을 따지는 건 고리타분하고 외려 차별일 게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이 외국계 기업처럼 지난 30년간 여성 인재들을 키워왔고 지금 키우고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리더스인덱스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의 남녀 직원 대비 남녀 임원 비중은 5배 넘게 차이가 난다. 게티이미지
리더스인덱스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의 남녀 직원 대비 남녀 임원 비중은 5배 넘게 차이가 난다. 게티이미지

김영희 | 논설위원실장

대학을 나와 1993년 들어간 회사에서 힘들게 임원을 달았던 한 친구가 최근 퇴임을 통보받았다. 발표가 나던 날, 그는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고 소속사 대부분 사무실과 오래 일한 본사까지 일일이 돌며 인사를 나눴다고 했다. ‘잘리는’ 임원들은 죄지은 듯 조용히 사라지거나 아예 회사에 안 나오는 게 당연시되는 연말 대기업의 인사철 풍경에선 ‘튀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더 못 올라간 데 대해 할 말 많지. 하지만 함께 일한 남성후배들이 임원 된 것도 뿌듯하고 29년간 나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해. 도망치듯 회사와 이별하고 싶지 않았어.” 많은 말이 생략돼 있지만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1990년대 초반은 대졸 여성들이 처음 대기업에 본격 진출한 시기였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 첫 시행과 여성의 대학진학률 30% 돌파가 큰 배경이었다. 1992년 비서전문직, 1993년 여성전문직 공채로 한국 대기업에 실질적인 ‘여성 공채’ 시대를 연 삼성은 1996년 여성 직원들의 이야기를 묶어 <여자가 힘든 건가요, 내가 힘든 건가요>를 펴내기도 했다. 고 이건희 회장이 10여년 전 여성 임원들에게 “사장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세월이 흘러 ‘마침내’ 삼성에서 첫 여성 사장이 나왔다. 일부 언론은 사설까지 쓰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정보기술(IT)업체 여성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몇년 된 현상이지만, 올 연말 4대 그룹 가운데 삼성·에스케이(SK)·엘지(LG)에서 여성 사장과 시이오들이 동시에 나온 건 분명 특기할 일이다. 

그런데 하나 더 특기할 건 이정애 엘지생활건강 대표이사를 제외하곤 모두 외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몇년 전부터 두드러진 여성 임원들 약진에선 기술직 공채거나 해외 유학 경력에 외국계 마케팅 회사에서 능력을 키운 인물이라는 패턴이 주요하게 반복되고 있다. 요즘 같은 ‘능력주의’와 ‘대이직’ 시대에 첫 직장을 따지는 건 고리타분할 뿐더러 차별일 게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이 외국계 기업처럼 지난 30년간 여성 인재들을 키워왔고 지금 키우고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2010년 삼성의 여성 직원 책에 실렸던 16명을 확인했을 때 남아있는 이는 임원이 된 단 한명이었다.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은 “우리끼리 ‘독거노인 아니면 생계형’이라는 자조적인 농담도 한다. 남편이 잘 버는 여성들에겐 왜 자리 차지하냐는 분위기가 있는데 싱글이거나 남편이 못 벌면 ‘그래 너도 우리와 마찬가지지’ 같은 시선이니까”라고 말했다. 다른 대기업의 한 여성 부장은 해외 주재원을 보내는데 남편은 같이 가지 않는다니 회사에서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냐.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다”며 해당 후보를 주저앉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업분석기관 리더스인덱스의 박주근 대표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0년 2%를 돌파한 여성 임원 비중이 2022년 1분기 6.3%가 됐다. 그런데 남·녀 직원 대비 남·녀 임원 비중은 남성이 5배가 높다. 임원 직무는 기술과 마케팅이 엇비슷하고 특히 재무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다. (500대 기업 10884명 조사) 단적으로 외국계기업은 한국 여성 시에프오(CFO)가 대부분인데 우리 대기업엔 하나도 없다. 총수일가를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지배구조를 가진 대기업들이 측근 중심의 운영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여성은 그 이너서클에 끼지 못하는 것이다.” (*엘지는 이번 인사에서 엘지유플러스에 첫 여성 시에프오가 나왔다고 12일 밤 전해왔다.) 여성 인재가 자라지 않는 것 자체가 후진적인 한국 대기업의 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말인 셈이다.

2년 전 국회에서 ‘극적’으로 통과된 개정 자본시장법이 올 8월 시행되며, 2조 이상 자산을 가진 상장기업 이사회에 여성이사 최소 1명이 의무화됐다. 이에 힘입어 30대 그룹 219개 기업의 여성 사외이사는 지난해 3분기 대비 올해 3분기 46%(38명)가 늘어났다. 반면 여성 사내이사는 제자리다. 게다가 전문성과 독립성에 기반해 경영을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 제도의 애초 취지와 달리 한국에선 정권과의 네트워크를 ‘보충’하는 의미가 더 크다. 관료, 법조계 출신이 많은 이유다. 리더스인덱스 조사에 따르면, 여성 검사장 출신 세명이 모두 복수의 사외이사를 맡는 등 개정 법 이후에도 출신이나 역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임원들이 늘고 있지만 승진 비율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리더스인덱스 제공
여성임원들이 늘고 있지만 승진 비율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리더스인덱스 제공

여성 임원 스스로 ‘여성’이란 점이 부각될까 걱정하고 네트워크 형성을 피하는 분위기 또한 적잖다.  엘리트 의식 탓도 있겠지만, 여성이 상징적인 ‘토큰’에 머무는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유럽연합 의회가 10년의 논쟁 끝에 지난달 27개 회원국 기업에 2026년까지 여성 이사를 40%(비상임 경우)이상 두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유경쟁시장의 천국’인 미국조차 나스닥 상장기업의 이사회 다양성 규정이 도입되며 올 8월부터 기업들의 다양성 공표가 잇따르고 있다. 2025~2026년까지 3500여개 상장기업이 최소 여성 1명과 소수인종 또는 성소수자 1명을 이사로 두도록 했는데 유럽과 달리 처벌규정은 없다.

여성 할당제가 기업 수익과 인과관계를 갖느냐는 서구에서도 논란의 대상이다. 유럽연합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여성 증가가 기업의 윤리적 측면이나 사회적책임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시각 역시 “자칫 여성은 덜 경쟁적이고 덜 모험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는 잘못된 질문”이라며, 다만 팩트 중심의 집중적인 논의 구조를 가져오고 상호작용을 증대시킨다는 연구결과는 많다고 밝혔다.

사실 우리는 이를 제대로 검증해볼 기회조차 없지 않았나. 대부분 국가가 공기업이 지배구조에선 앞서가는 법인데 민간기업에도 여성이사 1명 이상이 의무화된 마당에 공기업에 이런 규정이 없다는 한국의 현실 또한 한심한 일이다. 한술 더 떠 윤석열 정부는 부처 평가 기준에서 여성 관리자 확대 성과 등을 제외하기까지 했다.

여성 사장이라는 ‘빛나는 별’이 한두명의 성공사례에 그치지 않으려면 여성 임원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동시에 여성들이 기업에서 살아남고 올라가는 방식도, 떠나는 방식도 다르길 기대한다. 성별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식과 판단과 행동이 다른 이들이 늘어날 때 폐쇄적인 한국 기업문화에도 균열을 낼 것이다. 이제 여성 임원 2라운드다.

d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아침햇발] 1.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아침햇발]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2.

다시 전쟁이 나면 두 번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철 칼럼]

[사설] 국책사업·이권 개입으로 번지는 ‘명태균 의혹’ 3.

[사설] 국책사업·이권 개입으로 번지는 ‘명태균 의혹’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4.

[사설] 윤 대통령 “‘살상 무기’ 지원 검토”, 기어코 전쟁을 끌어들일 셈인가

중의원 선거에 나타난 민의 [세계의 창] 5.

중의원 선거에 나타난 민의 [세계의 창]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