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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한국와이퍼㈜에 주목하는 이유

등록 2022-11-29 19:05수정 2022-11-29 19:1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갖는 큰 특권 중 하나는 자신의 사업을 중단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산 과정에서 배당과 임금 지급 등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자본가의 사업 중단 결정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없다. (…) 경기 안산에 있는 중소기업 한국와이퍼㈜에서 지금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윤미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와이퍼 지회장이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등에 관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뒤편 정주력 한국와이퍼 대표. 공동취재사진
최윤미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와이퍼 지회장이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등에 관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뒤편 정주력 한국와이퍼 대표. 공동취재사진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신규 임용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공무원 노동기본권 바로 이해하기’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강의가 끝난 뒤 채팅창에 올라온 강의 소감문 중에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어 보는 시각은 교정돼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하면서 ‘자본가’라는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참 이상했다.

논문에 ‘자본가’, ‘자본주의’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구시대의 산물처럼 취급하는 미국 주류 경제학계의 영향을 받은 교수들이 대부분인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집필한 교과서로 공부한 사람들에게 노동문제에 관해 강의할 때는 강의 효율을 위해 그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강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강의 내용 전체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고 귀를 닫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강의 취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의 내용의 진보적 수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눠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 오히려 문제다.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현격히 불리한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기본적 구도에 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하나의 예로, 노동자가 ‘해고무효확인’이나 ‘노동재해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한 경우,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인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노동자는 해고 또는 불이익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편에 서 증언할 동료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런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논리정연하게 증언하는 회사 쪽 증인은 여럿인 반면 노동자 쪽 증인은 한명밖에 없는데 그마저 어눌하게 증언한다면 그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회사에 다녔지만 그 뒤 퇴사한 동료 직원 중에 연락되는 사람이 있느냐?”고 반드시 물어본다. “송사에 휘말리면 집안 망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살아온 동료 노동자들을 설득하러 찾아갈 때마다 ‘바늘 끝만큼의 거짓도 없이 오로지 진실한 마음으로 밤을 새워서라도 대화하자’고 생각했다.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눈 끝엔 대부분 증언을 약속받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별명 중 하나가 ‘설득의 대가’였다. ‘진실’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갖는 큰 특권 중 하나는 자신의 사업을 중단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산 과정에서 배당과 임금 지급 등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자본가의 사업 중단 결정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없다.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하지만 그런 상황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본가는 다른 지역에 다른 기업을 설립해 수익을 계속 창출할 수 있다.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자본가에게는 노동조합 없는 ‘깨끗한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경기 안산에 있는 중소기업 한국와이퍼㈜에서 지금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80여명 노동자가 실직할 상황에 부닥쳤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런 사달이 벌어질지 몰라 노동조합은 단체협약을 통해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지만, 자본가가 더는 사업을 운영하지 않겠다는데야 그 단체협약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노동자들이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정치인들이 회사 경영진을 만난다고 해도 자본가가 요지부동이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년 전 이맘때쯤, 노동아카데미 종강 수업에 한국와이퍼㈜ 노동자를 초청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꿈에 관해 묻자 그 노동자가 답했다. “홀어머니가 키워주셨는데, 전세 살면서 확정일자 받는 것을 몰랐어요. 전세금을 날리게 된 거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어머니가 법원에 가서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렸는데, 법원 직원이 한자가 가득 써진 문서 양식을 주더래요. 어머니가 눈앞이 깜깜해지셔서….”

그걸 질문이라고 던진 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에 우리 모두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사연을 간직한 280여명 노동자의 삶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번 기회에 자본가들의 사업 중단 결정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자.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치라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280여명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은 어떻게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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