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반도에는 정세관리자가 없다. 위기의 내용이 아니라, 위기관리의 주체가 없다는 점이 위기의 본질이다. 한반도와 주변국 모두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위험한 악순환 국면’이다. 평화를 만드는 노력이 없으면, 당연히 평화를 지키기도 어렵다. 평화를 누려서 평화를 잊고 살지만, 현재의 평화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유지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군은 7일 한-미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해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대남 군사 작전을 진행했다면서 앞으로도 압도적인 실천적 군사 조치들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전쟁 3개월 이내에 미군 5만2천명, 한국군 49만명, 민간인 100만명이 사망하고, 전쟁 비용은 1천억달러를 넘을 것이다.” 2002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에게 말했다. 북한을 선제공격의 대상에 포함한 미국 대통령이 과연 전쟁의 결과를 알기나 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이 통계는 1994년 북한 핵시설 공격을 준비했던 미국 국방부의 자료였다. 충격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북한을 침공하지 않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여러번 전쟁 위기를 겪었지만, 전쟁의 문턱을 넘지 않았다. 전쟁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공감도 작용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언제나 정세관리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8년 베트남에서 전쟁 중이던 미국이 두개의 전쟁을 할 수 없어 상황관리에 나서거나, 1976년 판문점 나무 자르기 사건처럼 북한이 후퇴하거나, 또는 2002년이나 2017년처럼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위기의 증폭을 막았다.
현재 한반도에는 정세관리자가 없다. 위기의 내용이 아니라, 위기관리의 주체가 없다는 점이 위기의 본질이다. 한반도는 최근 아찔한 국면을 통과했다. 한·미 양국의 군사훈련이 5년 만에 규모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내용도 공격적으로 변했다. 북한의 대응도 달라졌다. 북한은 과거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대화를 중단하거나 비난을 강화하거나 몇발의 미사일 발사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번에 북한은 ‘대남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응훈련에 나섰고, 며칠 사이에 35발의 각종 미사일을 발사했다.
앞으로 한-미 군사훈련이 열리는 매년 봄과 가을에 우리는 공포의 시간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는 현재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30년 동안 존재했던 거의 모든 신뢰 구축 조치가 무너졌다. 핵심은 핫라인의 불통이다. 1972년 중앙정보부 시절에도 남북한은 핫라인을 통해 우발적 충돌을 막았다. 언제나 오해와 오판이 전쟁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리 관계가 나빠도 최후의 순간에 서로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소통의 채널을 열어두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국내정치적 활용,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북한의 핵 능력을 고려하면, 한반도의 전쟁 피해는 당연히 1994년의 추정과는 비교할 수 없다. 북한은 올해 9월 핵 사용 규정을 방어가 아니라 공격징후에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비핵화의 가능성이 멀어지고 핵전쟁의 가능성 때문에, 국내적으로 핵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한-미 동맹을 유지하는 한 핵무장은 불가능하다. 전략핵무기의 성능 개선으로 전술핵무기의 군사적 효과도 없다. 핵 공유 방안 역시 핵무기가 한국 내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현실성이 없다.
군사적으로 미국의 확장 억지와 한국군의 재래식 보복 능력의 결합으로 억지 효과는 충분하다. 한반도는 작전 종심이 짧고, 이미 재래식 군사력으로도 상호확증파괴를 할 수 있기에, 북한의 핵 능력 강화가 현재의 ‘공포의 균형’을 깬다고도 볼 수 없다. 문제는 핵전쟁이 아니라, 제한적인 충돌의 가능성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에서 확인했지만, 핵을 가지면 전면 전쟁은 어렵지만 제한적인 군사적 충돌은 일어날 수 있다. 제한적인 도발이 전면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핵을 가진 자의 오판 때문이다.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다. 남북 모두 대규모 군사훈련을 주고받으면서, 접경지역의 충돌을 막기 위한 9·19 군사합의도 사실상 파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중 관계의 악화로 양국의 한반도 정세관리를 위한 협력이 사라졌고, 한·미·일 삼국은 북한의 도발을 명분으로 대중국 억지를 위한 군사적 협력만 강화하고, 남북은 군사적 모험주의로 질주하고 있다. 한반도와 주변국 모두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위험한 악순환 국면’이다. 평화를 만드는 노력이 없으면, 당연히 평화를 지키기도 어렵다. 평화를 누려서 평화를 잊고 살지만, 현재의 평화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유지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평화는 전쟁,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 브러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의 대표적인 구호다. 민주주의는 다르다. 예속이 자유가 아니듯이, 힘이 무지가 아니듯이, 전쟁은 평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