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조문객들이 써내려간 쪽지는 온통 미안하다는 사과와 자괴의 비통함으로 가득하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사과 한마디 없이 뒷짐 지고 있는데 힘없고 권력 없는 시민들은 이 어이없는 참사에 자책하며 고개를 숙인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희생자 추모 메시지 가득한 이태원역.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핼러윈이 뭐길래 그런 데 몰려다니냐는 힐난은 미친 소리다. 젊은이들이 철없다고 혀를 차는 늙은이들에게도 오래전 크리스마스이브에 할 일 없이 명동거리를 배회하며 인산인해의 복닥거림 속에서 해방감을 맛보던 청춘의 추억이 있다. 멋 부린답시고 빼입은 옷차림으로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인파에 파묻혀 데이트하고 노래 부르고 술 마셨다. 거리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대형 스피커를 타고 흘러넘칠 때 약속이나 한 듯 젊은이들이 명동으로 몰려든 건 그 날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해방의 밤이었기 때문이고 그곳이 젊은이들로 가장 붐비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적 불명의 축제, 종교적 기원과 무관한 한국판 카니발을 즐겼다고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태원의 젊은이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나라의 치안과 통제력이 이 정도로 개판인 줄 모르고 국가의 존재를 믿었다는 순진함뿐이다.
이태원행 지하철을 탔다. 가봐야겠다는 마음과 현장을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망설임 속에서 발길이 엇갈렸다. 이태원역 승강장에서 출구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는 길고 가팔랐다. 그날 들뜨고 상기된 얼굴로 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을 젊은이들 그 누구도 이 오르막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태원역 1번 출구 계단참의 타일 벽에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익명의 시민들이 남긴 애도의 손편지는 지하철역 출구 양벽을 타고 가로등과 보행로 가드레일까지 담쟁이덩굴처럼 이어졌다. 조문객들이 놓고 간 꽃들이 무덤처럼 쌓이고 인형과 초콜릿, 과자와 음료수가 곳곳에 더미더미 놓였다. 해 질 녘이 되자 자원봉사자 몇몇이 긴 비닐을 펼쳐 바닥에 놓인 조화와 손편지를 조심스레 덮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해둔 작은 테이블 위에 포스트잇과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다가가서 무언가 적어보려 했지만 한뼘짜리 쪽지의 공백이 아득해서 손끝이 막막했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수없이 되뇌던 말을 또 하려니 염치가 없다.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뭘 한 걸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떤 이는 미안하다는 말만 세번 반복해 썼다. “얘들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합니다. 믿고 맡길 만한 나라를 만들 어른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잘못 없습니다.” 시민 조문객들이 써내려간 쪽지는 온통 미안하다는 사과와 자괴의 비통함으로 가득하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사과 한마디 없이 뒷짐 지고 있는데 힘없고 권력 없는 시민들은 이 어이없는 참사에 자책하며 고개를 숙인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는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들, 유족과 지인들뿐 아니라 국가의 부재와 치안행정의 붕괴에 충격적 상실감을 느끼는 국민 모두에게 깊은 화인으로 남았다. 일터에서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불에 타 죽고, 집에서 잠자다가 수해로 물에 잠겨 죽고, 놀러 나가서도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나라.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에서 보통사람의 목숨값은 새털처럼 가볍고 낙엽처럼 부질없다. 지금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재난공화국에서 운 좋은 생존자로 살아간다.
이태원에서 희생된 무고한 젊음 중에는 지난 대선에서 1번을 찍은 이도 있고 2번을 찍은 이도 있을 것이다. 재난 방지와 생명 보호에는 진영이 없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일부 민주당 의원들과 강성 지지자들도, 세월호 참사와 같은 끔찍한 재난의 재발 방지를 위해 전 정부는 집권 5년간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성찰해야 한다. 수선스러운 꼬리 자르기로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골몰해 있는 윤석열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전철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망언으로 국민을 분노케 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재난안전관리체계 개편 티에프(TF)의 수장으로 세우고 돈 몇푼으로 할 일 다 하는 것처럼 생색내려 드는 건 뻔뻔하고 어이없는 짓이다.
지난 토요일, 숭례문 앞에 5만여명 시민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 가을비에 신발과 바지가 흠뻑 젖었지만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손팻말을 소매로 닦아가며 시민들은 핸드폰 촛불로 자리를 지켰다. “살릴 수 있었다. 구할 수 있었다. 국가의 책임이다.” 그건 투쟁구호가 아니라 절규와 호소였다. 가을비가 세차게 퍼부을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빗물이 도랑처럼 흘렀다. 유족들의 피눈물처럼 빗물은 흐르고 우리는 그 빗물 속에 모두가 죄인이었다.
지난 12일 저녁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서 열린 이태원참사 희생자 추모,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시민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 화면을 켠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장대비가 내린 이날 집회에서는 촛불 대신 휴대전화 촛불이나 엘이디(LED) 초를 들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