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만 해도, 불평등이 큰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경제 발전에 필요악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상위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그만큼 저축이 늘어나 투자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 전세계적으로 소득분배는 악화가 되는데 생산투자비율은 줄어드는 추세다. 최상위층의 천문학적 소득 증대가 생산적 투자보다는 금융상품으로 쏠리게 되고 이런 상품은 팍팍해진 저소득층의 부채를 메꾸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자유무역의 혜택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할 수 있음을 보인 그의 ‘신무역이론’이 경제학에 공헌한 바를 인정한 것이다. 그때는 바야흐로 ‘자유무역’을 내세운 세계화가 세계금융위기 때문에 잠시 멈칫했을 때였다. 게다가 중국의 공격적인 수출 공세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제조업 고용이 휘청이고 있었다. “무역이 너희를 부유하게 하리라”는 경제학적 교리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사람들은 그 부유로운 ‘너희’가 누군지를 묻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자유무역으로 회사 문을 닫고 일자리를 잃거나 벌이가 나빠지는 일이 많았고, 무역 앞에 ‘너희’가 모두 평등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마침 노벨상을 받은 크루그먼의 무역이론은 시장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면 모두에게 새로운 기업과 고용의 기회가 있음을 확인해줬다고 믿었다. 그 역시 모두가 궁극적으로 무역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줄곧 주장해왔고, 노벨상을 받을 즈음에도 “무역이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3년 남짓 시간이 흐른 뒤인 지난해 그는 그런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했다. 무역과 관련된 급속한 변화의 파괴적 영향을 일시적이고 소규모인 것으로 과소평가했고, 이로 인해 세계화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뒤늦은 고백의 이면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무역 ‘충격’으로 산업이 몰락하고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해서 기업과 노동자가 ‘세상 물정’을 빨리 깨치고 재빨리 ‘합리적’ 선택을 해서 고향과 부모를 떠나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과 자원은 허공의 바람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다.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고, 감정적 비용도 적지 않다. 길을 가다 보면 발바닥에 느껴지는 마찰음처럼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 비용이 막대한데 정책적 지원마저 부실하면, 노동자와 기업은 늪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무역의 혜택에서 멀어지고 패자가 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건강도 나빠지고 가족과 사회가 함께 앓게 된다. 게다가 이런 불평등 효과는 규모도 크지만 지속적이다. 한번 잔뿌리를 내리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또 이렇게 불쏘시개를 찾은 불평등은 정치적 불만으로 자라난다.
그 결과, 지금은 ‘닥치고 무역’에 대한 반대 정서가 강하고, 많은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심지어 ‘포용적인 무역’을 위해 보호주의적 무역정책도 불사한다. 다만 ‘보호주의’라는 말의 정치적 휘발성 때문에 그 표현은 애써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뻔한 상식적인 얘기다. 무역한다고 모두가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정치적·정책적 노력이 문제인 것이고, 그 노력을 방기했기 때문에 세계화가 스스로 퇴조의 길에 들어섰다.
불평등이 커지고 여기저기서 빨간불이 켜지자 경제 전문가들은 발 빠르게 묻기 시작했다. 이런 불평등 확대가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까. 낯설고도 까다로운 주제지만, 지난 10년간 수많은 연구가 나왔다. 최근까지만 해도, 불평등이 큰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경제 발전에 필요악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상위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그만큼 저축이 늘어나 투자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투자할 부유층에 돈을 몰아줘야 투자가 늘어난다는 논리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 전세계적으로 소득분배는 악화가 되는데 생산투자비율은 줄어드는 추세다. 그 이유는 최상위층의 천문학적 소득 증대가 생산적 투자보다는 금융상품으로 쏠리게 되고 이런 상품은 팍팍해진 저소득층의 부채를 메꾸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이래 상위 1%가 주도한 저축 증가분의 3분의 2 정도가 정부와 가계 부채로 연결됐다고 한다. 이를 분석한 논문의 제목은 ‘부자의 과잉저축’이다. 최근 금융 불안정화와 경제 혼란의 깊은 이면에는 ‘불평등의 복수’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양상은 곧 기업생산으로도 연결된다. 소득분배 악화는 생산적 투자의 상대적 부족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격차도 확대한다. 불평등 확대로 비예금 금융자산으로 돈이 몰리면, 상대적으로 예금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은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고용과 임금 사정도 나빠진다.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다. 다시 한번 미국의 연구를 인용하자면, 1980년 이래 최상위 소득의 비약적 증가로 소기업의 일자리는 16%가량 줄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발표한 국제결제은행(BIS)의 연구는 한발 더 나간다. 꽤 오랫동안 경제 전문가들은 불평등이 오뚝이 같다고 믿었다. 소득불평등은 경제 악화와 함께 나빠졌다가 경제 회복과 더불어 개선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는 이런 통념을 뒤집고 불평등은 고삐에서 풀려나면 잡아오기 힘든 야생마와 같다고 주장한다. 어려운 말로, 불평등의 ‘이력현상’이다. 예컨대, 불평등이 큰 사회일수록 불황의 규모가 크고, 그런 불황은 기존의 불평등을 더 확대하며, 이렇게 확대된 불평등은 경기회복 시기에도 줄어들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심화한다. 이런 현상의 근저에는 저소득과 저임금이 있다. 불황 때 고소득층은 굳건하지만 저소득층은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고 이들의 사정은 불황이 끝나도 쉽사리 나아지지 않는다. 경제는 회복되나 분배는 악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변화나 세계화와 같은 구조적 요인으로 불평등이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경제법칙’이라 넋 놓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런 조치는 반시장적·반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거시경제 정책이다.
국제결제은행의 연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력현상이 있다면, 이자율을 중심으로 짜인 통상적인 통화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순환적 경기회복은 달성하겠지만, 오히려 불평등 이력현상을 강화해 회복의 속도와 규모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불황에 더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중앙은행의 은행’이라 불리는 국제결제은행은 재정정책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저소득·저임금 계층을 돕는 적극적인 재정개입을 강하게 옹호한다. 불평등 축소를 위한 재정정책이 곧 경제 안정책이라는 것이다.
불평등은 차가운 경제법칙의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아니고 절대 사소하지도 않다. 오히려 잘못 키웠다가는 큰불로 돌아오는 불장난과 같다. 싫어서 내던졌지만 멀리 돌아가서 결국 크게 돌아오는 부메랑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했다가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친다. 싫고 좋고를 따지고 구분할 문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