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희망이지만, 우리를 죽게 하는 것도 희망, 이른바 ‘가짜 희망’이다. “어떻게 되겠지 뭐” “과학기술이 해결할 거야”. 7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100년 뒤를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가짜 희망’이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시청역 인근 태평로에서 열린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1999년, 일곱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중세 천문학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다. 이 종말론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노스트라다무스나 요한계시록 등에 기댄 과거의 종말론은 온갖 상징으로 가득하기에 사술과 사이비 종교의 거름이 됐던 반면, 현재 새로운 인류의 종말론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과학적이다. 그중에서도 기후위기 예측이 그렇다.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에 따른 지구온난화로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상승하면 해수면이 최대 77㎝ 상승하고, 폭염, 홍수, 기근 등으로 인류 생존이 어려워지는 시간이 이제 6년9개월(2022년 10월 현재)쯤 남았다는 것이다. 1947년 자정 7분 전으로 시작했던 지구종말 시계는 올해 100초 전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임박한 재앙 앞에서 각종 대중매체, 서적, 인터넷 공간에서는 다양한 재앙 시나리오와 개인, 국가, 국제사회 수준의 수많은 과제를 제시하고 있고 여기서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 반대다.
수많은 결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 1회 채식을 하고, 웬만한 거리는 걷고,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접는 장바구니 하나쯤 가지고 다니는 ‘조금 불편한 삶’을 살자”는 ‘나 한사람이라도’ 대책은 효과가 있을까? 가장 가난한 10억명보다 평균 8000배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20명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있는데, 민초들의 일주일 한끼 채식이 효과가 있을까? 이산화탄소 배출량 1, 2위인 중국과 미국, 2030년 1인당 배출량 1위가 될 한국이 6~7년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마른 소똥을 연료로 사용해야 하는 빈곤국들에 무공해 연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인권학자 조효제는 최근 그의 책 <탄소사회의 종말>에서 ‘기후행동과 정의행동이 함께 가는 새로운 인권담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인간의 연대심, 정의감, 창의적 적응력에 대한 희망’에 기대는 그의 결론은 다소 허무하다. 인류의 질적 변화를 6년9개월 안에 끌어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책의 현실성은 재난이 임박할수록 “정치 선동, 메시아적 약속, 음모론, 가짜 뉴스, 여성, 외국인, 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 등이 그럴듯한 ‘설명’의 외피를 걸치고 등장하여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차별 확산될” 거라는 예측이다. 또한 “훗날 역사가들은 이 시대에 국내-국제 차원의 집합적 행동 문제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불평등, 탈진실, 무기력, 냉소주의, 포퓰리즘 등이 한꺼번에 엉키면서 기후위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공산이 작지 않다”는 그의 결론이다. 물론 그때까지 지구상에 역사가들이 살아 있다면 말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그 해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희망이지만, 우리를 죽게 하는 것도 희망, 이른바 ‘가짜 희망’이다. “어떻게 되겠지 뭐” “과학기술이 해결할 거야”. 7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100년 뒤를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가짜 희망’이다.
봉준호 감독의 2006년 작 <괴물>은 실험실에서 대량의 포름알데히드를 하수구에 버리라는 명령에 마지못해 따르는 연구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후 장면은 그런 환경오염이 만들어낸 ‘거대 생물체’의 출현이다. 정부와 시민들은 그것을 죽이려 뒤쫓는다. 이 지점에서 진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괴물은 누구인가?” ‘거대 생명체’인가, 아니면 대량의 독극물을 강에 버린 자인가? ‘거대한 생명체’, 높아진 해수면, 가뭄, 홍수와 기근, 코로나바이러스는 괴물이 아니다. 그것들이 문제라고 하는 이들, 거짓 희망을 유포하는 이들이 범인이다. 10억명보다 8000배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 이들의 행동을 중단시키고 그들을 추앙하는 이들을 ‘신속히’ 사회로부터 배제하지 않는 모든 대책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 효과가 없고, 효과가 없는 대책을 반복 주장할 때 우리는 ‘가짜 희망’의 배포자와 공범이 된다.
이 ‘가짜 희망’은 ‘가짜 절망’에서 나온다. 종말을 100초 남긴 상황에서, 우리가 기후위기에 진실로 절망하고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리 없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진정으로 절망한 자만이 신을 만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른바 절망의 변증법이다. 이것이 그를 신앙인이 아니라 실존주의자라 부르는 이유다. 나는 종말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자본주의의 극복, 연민공동체의 구축도 우리가 ‘가짜 희망’을 버리고 ‘진짜로 절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