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백기철ㅣ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주 초 외국 순방에 나서기 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싸잡아 비난했다. 남북정상회담은 “정치쇼”였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한 친구에게만 사로잡힌 학생 같아 보였다”고 했다. 외국 유력 언론에 전직 대통령과 우리 외교를 마구잡이로 폄하한 것이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인 셈인데, 순방 전부터 사고를 쳤다.
모든 정상회담은 화해·협력 또는 갈등까지 내보이는 정치적 보여주기다. 그 시점에서 최선의 절충일 뿐이다. 윤 대통령 말대로라면 남북정상회담은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문 전 대통령의 ‘역지사지 외교’를 “한 친구에게만 사로잡혔다”고 한 건 유치하기까지 하다. 문제 발언들이 사전에 준비됐다면 정말 큰일이고, 윤 대통령이 평소 생각을 내뱉었다면 외교 초보임을 자인한 꼴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무산은 준비 안 된 외교의 실패다. 경위야 어찌 됐든 런던엔 안 가느니만 못하게 됐다. 인터뷰 발언이나 조문 실패는 웬만하면 벌어지지 않을 일들, 제대로 준비했다면 생기지 않을 일들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윤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자유와 가치 연대를 또다시 역설한 건 공허하기 짝이 없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건 여기서도 적용된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동북아의 평화에 관한 소신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했어야 했다. 유엔 연설은 보편성에 입각해 우리 이야기를 설파하는 자리이지 추상적 자유론을 늘어놓는 곳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와 세계시민 연대를 얘기했으니 유엔에 가서 알리는 게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자기중심적 생각이다. 취임사는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항목을 중심으로 준비된 내용을 정리해 내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엔 연설은 국제사회가 한국 대통령에게 듣고 싶은 주제를 얘기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유엔에서 어떤 식으로든 북한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다.
윤 대통령이 외교에서 준비가 너무 안 됐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유엔 연설문은 다각도로 검토됐을 텐데 윤 대통령 특유의 아마추어식 접근이 유지됐다는 건 심각한 오작동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일 정상회담을 두고도 미숙함을 드러냈다. 대통령실이 공식 브리핑을 통해 양자회담 개최를 먼저 공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꼭 드러내고 싶었다면 익명으로 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초입부터 꼬인 이번 순방은 참사 수준의 실수들이 이어지면서 현재로선 낙제점에 가깝다.
현 정부 외교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윤 대통령이 면담하지 않은 건 일종의 미국 편향에 대한 균형추로서 의미 있는 절제 외교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담대한 구상이나 남북 이산가족 협상 제의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담대한 구상은 작명도 이상하고 창의적인 구석을 찾기도 어렵다. 한반도 상황이 크게 변했는데 이명박 정부의 판박이로는 요령부득이다. 북한더러 말 잘 들으면 떡 하나 더 준다는 식의 접근일 뿐이다. 북한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타협, 공생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문 전 대통령이 남북 군사합의 4돌을 맞아 ‘평화의 길’을 역설한 건 이상적이면서도 고답적이다. 남북한이 이전의 모든 합의를 존중하면서 역지사지의 대화를 할 것을 촉구했다. 원론적으로 맞지만 현실에서 얼마나 유효할지 의문이다.
한반도 상황은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이후 30년 넘게 세월이 흐르면서 근본적으로 변했다. 북한은 핵무기 사용을 법으로 정한 사실상의 핵 보유 국가가 됐고, 미-중 대결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가고 있다. 중국이 소련처럼 해체되지 않고 건재한 한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모델, 즉 독일 모델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남북은 앞으로 많은 세월 다른 나라처럼 ‘따로 또 같이’ 살아야 할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가 진보, 보수 정부 35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조금은 진전된 대북정책을 내놓기를 바랐다. 상황이 변했고 세월의 무게도 더해졌기 때문이다. 보수 정부는 원점에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 있는 여지도 더 많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현 정부에서 보수의 창의적인 대북 이니셔티브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일 것 같다. 현재로선 실수 없이 기본이라도 해서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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