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은 정작 자신의 비위 의혹에 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걸 하나하나 부인하는 것 자체가 이쪽에 관심을 쏠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응을 최소화하는 것”이란다. 권력암투의 생리에 밝은 그의 셈법은 영리하다. ‘이준석 성상납’ 프레임보다 ‘이준석 대 윤핵관의 권력투쟁’ 프레임이 그에겐 훨씬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올해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근래 읽은 글 가운데 어떤 시나 소설보다 깊은 울림을 준 글은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였다. 2236자 짧은 글에 농축된 깊은 사유와 성찰, 정교하게 절제된 시적 언어가 주옥과 같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란 대목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수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간결하고 아름다운 시어일 수 있다니! 수학이 이런 건 줄 알았더라면, 입안에 꾸역꾸역 톱밥 욱여넣듯이 억지춘향으로 수학을 공부하진 않았을 텐데.
오래전 <한겨레> 토요판에 인터뷰를 연재할 때 경북 김천에서 포도농사를 짓는 팔순의 농부 김성순 선생을 뵌 적이 있다. 질소(N)를 분모에 놓고 광합성 탄수화물(C)을 분자에 놔서, ‘N분의 C’가 좋은 농사의 기본 공식이라고 하셨다. ‘땅의 기운’인 질소와 ‘하늘의 기운’인 탄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농작물이 제대로 성장을 못하거나 성장을 하더라도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사람 사는 이치도 그와 다르지 않다던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 삶과 정치를 수학적 공식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무엇이 분모이고 무엇이 분자일까? 상수는 무엇이고 변수는 무엇일까? 수학계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라 할지라도 한국 정치를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지도자의 덕성과 자질이란 변수에 어떤 숫자를 대입하든 권력투쟁이란 함수에 들어가면 모든 윤리적·사법적 비위의 결과값이 0으로 수렴하고 증발하는 이 기괴한 방정식을 도대체 어떤 고등수학으로 설명해낼 수 있단 말인가?
요즘 국민의힘 지도부와 이준석 전 대표가 벌이는 정치공방은 극단적이지만 낯설지 않다. 집권여당 대표가 당원권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지만, 정작 이번 징계의 발단이 된 비위 의혹의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사건의 발단에 관한 진상규명은 부수적이고 그 결과로 나타날 권력의 향배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이준석은 2013년 기업체 대표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성접대를 받고, 900만원어치 화장품 세트와 250만원 상당 명절선물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만일 그가 성상납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성매매처벌법 공소시효 5년이 지나 형사처벌은 피한다 해도 공인으로서 윤리적·도덕적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 집권여당 대표가, 그것도 구태정치와 단절을 선언했던 젊은 정치인이 성상납과 알선수재 논란에 휩싸여 있고, 7억원을 주고 성상납 사건의 증인을 회유하려 했다는 증거인멸교사 의혹까지 받고 있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연이은 가처분 신청으로 맹렬히 저항하고 있는 이준석은 정작 자신의 비위 의혹에 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걸 하나하나 부인하는 것 자체가 이쪽에 관심을 쏠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응을 최소화하는 것”이란다. 권력암투의 생리에 밝은 그의 셈법은 영리하다. ‘이준석 성상납’ 프레임보다 ‘이준석 대 윤핵관의 권력투쟁’ 프레임이 그에겐 훨씬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랬듯 ‘권력으로부터 박해받는 자’의 이미지는 그의 주가를 급등시키는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번 싸움에서 패하더라도 그의 비위 의혹은 권력투쟁 구도 아래 묻힐 것이고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정치적 위기가 가속될 때 그는 언제든 정치적 대안 카드로 다시 호명될지 모른다.
이준석 전 대표 성상납 알선수재 의혹-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백현동·대장동 개발비리 의혹을 두고 정치적 공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되는 동안, 폭우와 수해와 치솟는 물가와 코로나 변이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의 삶은 시들어간다. 정치인이 성인군자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시민들처럼 잘못한 게 있으면 처벌받고 용서를 구하고 책임지길 바란다. 그게 누구든, 어떤 권력 구도에 있든.
허 교수의 글을 정치에 대입해 원글이 지닌 성찰과 통찰의 품격을 감히 훼손할까 두렵긴 하지만, 그런 감동을 주는 정치가 되기를 바라는 속절없는 바람으로 다시 그의 글에 밑줄을 긋는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허준이 교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