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과 떨림이 섞여서야 비로소 세상의 나침반이 된다. 내가 그 방향을 향해 제대로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나침반이라면, 방향과 떨림 어느 하나만 봐서 될 일은 아니다. 나침반 끝이 흔들린다고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 반동이고, 방향의 존재를 이유로 제가 선 곳이 옳다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퇴보다. 둘 다 앞길을 막기는 매한가지다.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비행기가 이른 새벽에 떠올랐다. 떠남에 떨림이 없을 수 없지만, 많이 만나고 떠나오는 날에는 유독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차가워진 새벽 공기에 비행기가 잠시 흔들렸다가 별일 없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날아간다.
김훈의 <하얼빈>을 꺼내 읽었다. 안중근의 뜨거운 삶을 그린 글은 서늘했다. 손을 움켜쥐고 가슴을 터지게 하는 용광로의 역사를 기어이 빙하계곡으로 끌고 갔다. 식히고 난 뒤 남은 것들을 무심한 듯 기록해 두었다. 안중근은 평화를 온전히 말하기 위해서 총을 들었으나, 그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그러니 총성이 울리던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죽음의 광경마저도 고요하고 짧았다. “옥리가 안중근의 겨드랑을 팔에 끼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옥리가 안중근의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대 바닥을 밟았다. 바닥이 꺼졌고, 안중근의 몸이 허공에 매달려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 짧은 세 문장 끝에, 내 몸도 같이 내려앉았다.
수다스럽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이 떠들어대는 영웅서사는 제쳐두고, 김훈은 인간 안중근의 앙상한 살가죽과 뼈만 기록했다. 그가 남긴 가족들이 겪었던 “굴욕”도 빼지 않았다. 차남 안준생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비가 죽기 전에 ‘오해에서 비롯된 폭거’임을 인정했다며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 기록해야 하나 차마 적지 못한 김훈은 이를 ‘후기’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아비를 부정해야 살 수 있는 가족의 엉킨 미래를 직감하고 있었기에 그의 총구는 조금 더 떨렸을 것이다. 그 떨림이 전해지고 나서야, 나는 인간 안중근의 역사적 성취를 뜨겁게 이해하게 됐다. 서늘한 글이 가장 뜨겁다.
또 생각해 보면, 가야 할 곳이 분명하고 그 방향으로 온몸을 온전히 돌려세운 사람은 끊임없이 떨리는 자다. 그래서 신영복이 말하기를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향과 떨림이 섞여서야 비로소 세상의 나침반이 된다. 내가 그 방향을 향해 제대로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나침반이라면, 방향과 떨림 어느 하나만 봐서 될 일은 아니다. 나침반 끝이 흔들린다고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 반동이고, 방향의 존재를 이유로 제가 선 곳이 옳다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퇴보다. 둘 다 앞길을 막기는 매한가지다.
떨리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길 위의 사람들에게 앞뒤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은 안중근과 함께 총을 겨눴던 ‘공범’ 우덕순을 단순한 ‘하수인’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안중근을 국제정세를 오해한 사상적 기형아로, 우덕순은 그런 사상적 동기마저 결여한 우매한 하수인으로 만들면, 이 두 사람의 총알은 방향 잃은 오발탄이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담배팔이’에 불과한 자가 뜻한 바가 있어 권력의 핵심을 쏘려 했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재판 과정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둘의 독자적 행동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음을 분명히 했다. 대화와 설득도 없었으며,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 같았다뿐. 그래서 우덕순은 말했다.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이에 김훈이 쓰기를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우덕순은 떨림의 동지였다.
<하얼빈>을 덮고 송경동의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를 읽었다. 거기도 온통 떨림이다. 떨림으로 버티는 얘기다. 떨리는 사람은 굳건하게 버티는 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현장에서 단식을 밥 먹듯이 해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처럼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시인은 “내가 얼마나 얄팍하고 얍삽한 인간인지를” 괴로워한다. “노동자 민중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 중에도/ 나는 대장만 하고 싶어요 하는 이 많”은 곳에서 그는 “어느 틈에/ 내 안에도 들어와 사는 큰 원숭이 한마리를 본다/ 작은 재주에 으쓱하고 쉬지 않고 재롱을 부리며/ 광대처럼 무대에서 박수만 받고 싶어하는 원숭이/ 사회를 검색하는 일보다 자신을 검색하는 일이 더 많고/ 숨겨진 진실을 캐는 일보다/ 눈곱만한 자산을 계량하는 일이 더 많아진 원숭이”. 저렇게 흔들리다가 나이 사십에 첫 시집을 낸 시인은 “나는 계속 꿈꾸는 소리나 하다/ 저 거리에서 자빠지겠네”라고 한다. 그러면서 “시인이 되는 것보다 인간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떨림은 이렇게 그의 운명이고, 그래서 그의 ‘말’은 뜨겁고 아프다.
떨림의 말은 작으나 어디에나 있다. 잘 들리지 않을 뿐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고 자백하면서 외려 자유로워진 조형근은 젊은 시절의 떨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사당동 철거촌의 기억, 무엇보다도 “백골단과 철거용역이 진압하러 왔을 때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가까웠던) 할머니 가족은 떠날 수 없었다”는 기억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다. 공부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다가 “인간이 되는 게” 중요해서 교수라는 직업으로서 학문의 업을 버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하니, 그의 글은 나침반 바늘보다 더 흔들린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고 외려 든든하다.
떨리지 않는 자는 기본적으로 지배하려는 자다. 그러려면 ‘큰 말’이 필요하다. 정의, 역사, 국민, 그리고 민주주의.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떨리지 않는 자들끼리 짐짓 싸우는 듯 연합하면 된다. 잔을 높이 올리며 건배를 하면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건배’에 대해 이렇게 적어뒀다. “건배는 프랑크족의 전통이다. 그들은 건배를 하면서 각자 자기 잔의 술 방울이 다른 사람의 잔에 떨어지게 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술잔에 독을 넣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술잔을 세게 부딪칠수록 흘러넘치는 술이 많아지므로, 서로의 술이 섞일 가능성도 커진다. 따라서 술잔을 세게 부딪칠수록 더 정직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된다.” 무릇 건배를 높이 들어 즐기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
밤새 시간을 거꾸로 달려온 비행기는 이제 땅으로 내려간다. 고도를 낮춘다. 구름은 자욱하고, 비행기는 다시 떨린다. 모든 변화는 떨린다. 조금 남은 와인, 나는 건배하지 않고 훌쩍 마셨다. “말은 자욱했는데, 아무도 말을 믿지 않”는 곳으로 간다.(<하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