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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자회담, 미국의 책임회피와 ‘중재자 중국’의 출현

등록 2022-08-22 18:07수정 2022-08-23 02:37

[이제훈의 1991~2021] _35
6자회담은 북-미 양자협상을 꺼린 부시 행정부 책임회피의 부산물이지만, 의도하지 않은 좋은 협상 틀이었다. 동북아시아의 역내 질서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가 모두 협상 탁자에 앉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 밖’에 방치되거나 내쫓긴 이해당사자가 아무도 없다. 6자회담은 ‘동북아 탈냉전의 씨앗’을 품은 훌륭한 배양기였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 6자회담은 북핵 대응에 중국을 끌어들인 부시·네오콘의 책임회피 전략과, 미국이 내민 손길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6자회담을 ‘떠오르는 강대국’의 존재감을 과시할 기회로 삼으려 한 중국의 동상이몽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연합뉴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 6자회담은 북핵 대응에 중국을 끌어들인 부시·네오콘의 책임회피 전략과, 미국이 내민 손길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6자회담을 ‘떠오르는 강대국’의 존재감을 과시할 기회로 삼으려 한 중국의 동상이몽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연합뉴스

2002년 말~2003년 초 불거진 ‘한반도 제2차 핵위기’는 1993~1994년 제1차 핵위기 때와 몇가지 점에서 다른 경로를 밟았다. 첫째, 1994년 6월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과 같은 한반도 전쟁위기로 바로 번지지 않았다. 둘째, 초기 수습과정에서 북-미 양자협상이 아닌 다자협상 틀이 모색·실행됐다. 셋째, ‘중재자 중국’의 출현이다.

1994년부터 8년간 북-미 관계와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 구실을 하던 ‘제네바 기본합의’(1994년 10월21일) 체제를 부숴버린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2003년 3월20일)과 함께 ‘북핵 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북-미 양자협상과 ‘제네바 기본합의’를 “저자세 외교의 극치”라 맹비난해온 부시 행정부의 선택지에 북한이 바라는 양자협상은 들어 있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양자협상을 북한에 대한 보상이라 여겼다. 아울러 “북한 핵문제는 미국 혼자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외쳐댔다.

부시 행정부는 애초 ‘P5+5’틀을 2차 핵위기를 다룰 다자협상 틀로 북에 제안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5,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에 남북한과 일본·오스트레일리아·유럽연합을 더한 형식이다. 10개국 가운데 확실한 북한 편은 중·러 두 나라뿐이다. 북한이 받을 리 만무한 다자협상 틀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복잡하고 묘하다.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듯, 나쁜 의도가 나쁜 결과만 낳는 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라며 중국을 움직여 6자회담을 추진하는 방안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부시 행정부 8년간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는 회고록 <최고의 영예>에 적었다. 이렇듯 부시 행정부는 책임회피 차원에서 중국을 끌어들여 북한을 제어하려 했는데, 이 선택이 뜻하지 않은 나비효과를 낳았다.

부시 대통령의 명에 따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2003년 2월25일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러 동북아시아에 온 김에 베이징에 들렀다. 파월은 미국·남북한·중국·일본이 참여하는 다자(5자)회담을 조직해달라고 중국에 제안·요청했다. 중국은 즉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러자 부시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강경파들로부터 북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 또한 북한을 지금 견제하지 않으면 일본의 핵무장화도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로 설득했다고 라이스는 회고록에 적었다.

드디어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재자 중국’의 출현이다. 부시의 ‘부탁’을 들어주는 모양새로 중국이 미국과 협상에 쓸 ‘청구서’를 모은다는 셈법에 더해,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 국가주석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르는 강대국 중국’의 외교 역량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려는 전략적 판단 등이 두루 작용했다. 2003년 3월, 외교부장(장관)과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첸치천이 평양을 방문해 부시의 요청대로 ‘5자회담’을 입에 올렸다. 북이 이를 거부하자 첸치천은 북·미·중 3자회담 방안을 바로 꺼내들었다. 북-미 양자협상을 바라는 북한, 양자협상은 절대 불가하다는 미국 사이에 다리 놓기다. 북에는 ‘3자 틀 안의 양자’, 미에는 ‘양자가 아닌 3자’라는 명분을 주는 절충안이다. 뉴욕-베이징-평양의 3각 밀당 끝에 2003년 4월23일 베이징에서 북·미·중 3자회담이 열렸다. 3자회담은 아무런 합의 없이 끝났다. 그러나 북의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 탈퇴 선언(2003년 1월10일) 100여일 만에 북-미가 협상 탁자에 마주 앉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미국과 달리 북한을 잘 아는 중국의 능란한 외교적 수완의 성과다. 그렇게 겉보기에 합의 없이 끝나 실패한 듯하던 3자회담은 넉달 뒤 6자회담 출범의 밑돌이 됐다. ‘중재자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이 됐다.

부시 행정부는 베이징 3자회담을 애초 구상한 5자회담으로 전환하려 했다. 그런데 미국의 ‘5자회담’ 구상을 접한 러시아의 이고리 이바노프 외교장관이 “도대체 러시아를 배제한다는 아이디어를 누가 냈느냐”고 따지자 파월은 5자회담 구상을 러시아를 포함한 6자회담 구상으로 재빨리 바꿨다고 찰스 프리처드가 <실패한 외교>에 적었다.

북한은 미국의 예상을 깨고 ‘6자로 바로 가자’고 역제안을 했다. 베이징 3자회담 직후 “필요한 물리적 억제력을 갖추기로 결심”(2003년 4월30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했다고 엄포를 놓던 북은 “먼저 쌍무회담을 하고 계속해 미국이 제기하는 다자회담도 할 수 있다”(2003년 5월24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고 하더니, 마침내 “(추가) 3자회담을 거치지 말고 직방 6자회담을 개최하며”(2003년 8월1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라고 태세를 빠르게 전환했다. 북으로선 자국에 불리한 구도인 5자(북·중 대 한·미·일)보다는 러시아가 포함된 6자가 미국을 다룰 때 힘의 균형을 맞추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의 6자회담 수용 직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피그미”라 조롱하던 부시가 “미스터 김정일”이라는 예의를 갖춘 호칭을 입에 올리고, 다이빙궈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방북 등 중국의 집요한 대북 설득이 밑돌을 놓았다.

6자회담은 북-미 양자협상을 꺼린 부시 행정부 책임회피의 부산물이지만, 의도하지 않은 좋은 협상 틀이었다. 동북아시아의 역내 질서에 직접적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가 모두 협상 탁자에 앉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반도 임시 군사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 필요한 협상 당사국인 남·북·미·중 4국에 동북아 냉전 적대를 탈냉전의 협력안보질서로 바꾸는 데 남·북·미·중과 함께 참여해야 할 일·러가 결합한 구도다. ‘문 밖’에 방치되거나 내쫓긴 이해당사자가 아무도 없다. 6자회담은 ‘동북아 탈냉전의 씨앗’을 품은 훌륭한 배양기였다.

6자회담의 초기 성적표는 겉보기엔 낙제점에 가까웠다. 2003년 8월27~29일 사흘간 베이징 댜오위타이 팡페이위안에서 1차 6자회담이 열렸으나, 6자가 모두 동의한 회담 결과 발표문조차 내놓지 못했다. 협상의 밑돌이 될 공통 기반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미국 대표단은 자체 협상안도 없이 회담에 임했다. 예견된 결렬이다. 6자회담 의장인 왕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1차 6자회담 직후 “미국의 대북정책,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다”라고 불만을 감추지 않은 까닭이다.

2차 6자회담은 그로부터 6개월 뒤인 2004년 2월25~28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렸다. 1차보다 하루 길어진 회담 기간만큼의 “소박한 진전”(알렉산드르 로슈코프 러시아 외교차관, 러시아 수석대표)이 있었다. 1차 때의 ‘의장요약문’은 2차에서 ‘의장성명’으로 격상됐다. 중국 쪽 수석대표인 왕이 의장은 “‘상호 조율된 보조(step)’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의 수용” 등 다섯가지를 2차 회담의 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2차 회담에서도 눈에 띄는 진전은 없었다. 미국 대표단은 이번에도 자체 협상안을 내놓지 않았다.

3차 회담은 그로부터 넉달 뒤인 2004년 6월23~26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렸다. 3차 회담은 6자회담에 대한 실망을 퍼트렸다. 3차에 이르도록 아무런 실질 합의에 이르지 못해 6자회담의 지속 가능성에 물음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보다 큰 기대 또한 자극했다. “2004년 2분기 안에 3차 회담 개최, 실무그룹 구성”이라는 2차 회담의 약속대로 3차 회담이 열렸고, 그 직전 각국 차석대표가 참여한 ‘(사전)실무그룹회의’가 두차례(2004년 5월12~15일, 6월21~22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미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자체 협상안을 제출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협상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3차 회담은 6자회담의 대표 상징어가 된 “‘말 대 말’과 ‘행동 대 행동’” 원칙과 “단계적 과정”이라는 접근법에 각국이 공감함을 ‘의장성명’으로 공표했다. 더디지만 진전이 없지 않았다.

10개월 동안 1~3차 회담을 소화한 6자회담은, 4차회담을 소집하기까지 다시 13개월을 소모했다. 3차 회담과 4차 회담 사이에 6자회담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변화가 미국 쪽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 부시의 재선 성공 이후 새롭게 재편된 ’부시 2기 외교팀’의 출현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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