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우 |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영화 <헌트>를 보고 왔다. 1980년대 신군부의 폭정, 남북 갈등, 북한 공군 이웅평 귀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암살 폭발사건 등 오래전 이야기들을 재구성했다. 다소 상투적인 소재들이지만 섬세하고 아주 영리하게 엮어냈다.
감독이자 주연배우 ‘이정재’님의 활약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마치 몇편의 영화를 발표한 중견 영화감독처럼 완성도 높은 영화를 능청스럽게 만들어냈다. 쓸쓸한 바다를 뒤로한 여배우의 처연한 눈빛, 고통 속에서도 담담하게 건네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넌 다르게 살 수 있어”.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정재’님은 자타공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명이다. 대표작을 꼽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다. 내게 이정재님의 대표작 한편을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오버 더 레인보우>를 꼽고 싶다. 다소 의외의 선택일 수 있다. 흥행에 실패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됐던 2002년은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해, 사람들은 영화관 대신 축구경기장 혹은 응원장을 찾았다.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주인공의 직업 때문이다. 영화 속 이정재님은 기상캐스터로 등장한다. 대학을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대학 시절 짝사랑을 잊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히 날씨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시청자들에게 유쾌함과 위로를 건네는 기상캐스터. “연일 계속되는 비에 몸과 마음이 지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맑은 날엔 비 오는 날이 그립지 않을까요? 사랑은 비를 타고 온다고 하죠? 날씨였습니다.” 요즘 날씨에 꼭 어울리는 대사다.
평소처럼 하라고 호통치는 부장님에게 당돌하게 반문한다. “왜 일기예보를 뉴스라고만 생각하시는 거죠? 뉴스는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얘기하지만 일기예보는 내일을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중요한 대목이다. 일기예보는 오늘의 소식이 모두 전달된 뒤에 나온다. 내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8월 날씨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곳곳이 예상치 못한 날씨와 맞닥뜨렸다. 중부지방에는 호우경보가, 남부지방에는 폭염주의보가, 그리고 영동 산간지역에는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폭우, 폭염, 강풍. 불행히도 동시다발적인 주의보와 경보는 적중하고 말았다. 분명 장마가 끝났는데 정체전선이 중부지방에 드리워졌다.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기록적인 폭우를 쏟아냈다. 서울만 하더라도 강남, 서초, 동작 일대가 침수되고 인명피해마저 발생했다. 기상캐스터들은 종일 실황과 예보를 업데이트하느라 분주했다.
지난주 중부지방과 남부지방 일부 지역에 또 한번의 폭우가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보가 틀리고 말았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비가 내렸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여름철 강수예보 정확도가 40%밖에 안 된다고 질책하거나, 지구온난화 핑계만 댄다고 기상청을 비난했다. 곤혹스러운 것은 기상캐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예보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틀린 예보만 기억할 뿐이다. 당근은 없고 채찍만 있는 셈이다. 그 때문에 일기예보는 전공자들마저 꺼리는 분야가 됐다. 의료계에 빗대자면 응급의학과와 비슷한 상황이다. 일부러 사람을 살리지 않는 의사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일부러 예보를 틀리는 예보관은 없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첫사랑의 로맨스를 담은 영화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일상에는 내일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과연 내일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까? 날씨든 사람이든.
처서가 코앞이다. 여름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는다는 절기. 아직은 후덥지근한 날씨지만 처서가 지나면 비와 더위가 물러날까? 저녁 마실길에 영화관을 기웃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