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05 _정책생태계2
윤석열 행정부는 물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조금은 무거운” 정책관과 그리고 “더욱 다원화한” 21세기 정책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다. 그 요체는 정책이 자칫 잘못 결정되거나 집행되면 국민을 큰 혼선과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며, 더불어 최종 의사결정에 앞서 당사자는 물론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논의하는 숙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윤석열 행정부가 총체적 난맥상에 빠졌다. 국정 전반에 위기 경보가 울린다.
인사 실패에 따른 내각 공백, ‘사면초가의 무방향’ 외교, 시대착오적인 경제처방에 교육과 노동 등 잇따른 사회정책 혼선까지. 낱낱이 열거하기도 민망하다. 대선에 승리하고도 극심한 내홍에 휩싸인 집권 여당은 이런 난맥상을 더욱 볼썽사납게 한다. 한마디로 ‘윤석열 통치’가 온통 길을 잃은 모양새다.
역대급 낮은 대통령 지지율은 현 상황을 압축 상징한다. 여권에서는 정책홍보 부족과 정무감각 부재에 원인이 있다고 짚고, 대통령실의 정무와 홍보 라인 보강을 수습책으로 내놓는다. 문제의 핵심에서 한참 비켜난 표피적인 진단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난맥상을 초래한 상당 요인이 ‘정책 난조’에 있다는 점이다.
정권 출범 100일 전에 이처럼 전방위적 정책 난조를 보인 정부가 있었던가? 기실 윤 행정부의 다발성 정책 난조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정책관과 정책빈곤에서 연유한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 대한 몰이해는 더 근본 요인일 것이다.
이는 비단 윤 행정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문재인 행정부를 비롯해 역대 행정부의 몇몇 정책 실패 사례에서도 똑같이 확인됐다. 다만 윤 행정부에서는 그 몰이해가 매우 심하고, 여러 영역에 걸쳐 나타난다는 점에서 심각성의 정도가 다르다.
우선,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정책결정자들이 정책을 너무 손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정치권에서 볼 수 있는 “정책, 그까짓 거”라는 태도다. 대선 과정에서 이미 불거진 이런 태도는 정책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게끔 한다. 수시로 “국민”을 호명하면서도 정작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정책을 가벼이 결정하는 태도야말로 ‘날림 정책’을 낳는 뿌리다.
만 5살 조기입학 정책 결정이 딱 그랬다. 박순애 당시 교육부 장관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그저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머릿속에는 이 정책 추진과 관련한 ‘사람들’, 즉 아이들, 학부모,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 이해당사자들이 없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정책생태계 속에서 교육정책은 보육, 일자리 정책과 긴밀히 얽혀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문제가 지닌 이런 속성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었어도 윤 행정부의 그런 무모한 발표는 없었을 것이다.
정책 과정은 자연 생태계와 흡사하다. 숱한 다양한 종이 복잡한 먹이사슬로 얽혀 있는 생태계처럼 정책의 형성, 결정, 집행 등의 정책 과정은 다양한 행위자와 환경, 구성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작용한다. 이 작용의 총체를 ‘정책생태계’라고 부른다. 정책 과정에 대한 이 은유가 직시하는 메시지는 실은 아주 단순하다.
“세상이 복잡하듯, 사회문제 해결도 복잡하다는 것”이며 “정책을 만들거나 결정하고 집행할 때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를 신중히 살피라”는 뜻이다. “사회문제 해결은 이런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김승섭 서울대 교수)는 말은 정책의 속성과 정책생태계의 핵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정책 과정은 사회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와 안팎의 여러 요소가 작동하는 과정이다. 특히 이 과정은 다양한 ‘사람들’, 즉 여러 행위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 타협의 상호작용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정책은 본질에서 정치를 매개로 실현되며, 또한 속성상 설득과 상호비판 등 의사소통 과정을 필수적으로 수반해야 함을 알려준다. 정책결정자들은 의외로 이 자명한 명제를 간과한다. 상당수 정책 실패와 혼선은 이 단순 명제를 무시한 결과다. 그래서 정책의 실패는 정책생태계의 실패이며 정치의 실패다.
이 칼럼에서 한차례 언급했지만 한국의 정책생태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구조변동이 이뤄졌다. 대통령과 관료들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던 정책생태계는 생산과 소비, 유통 등에서 국회나 정당, 법원, 노사 및 시민단체, 연구기관과 학계, 언론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다원화한 형태로 바뀌었다. 특히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지지가 정책과 연계되면서 여론의 중요성이 커졌다.
다만 이런 변동에도 달라지지 않은 건 대통령과 청와대(대통령실)의 영향력이다. 정책의 주도권이 정당에 있는 유럽 의원내각제 국가와 달리 ‘한국형 정책생태계’에서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정책결정 권한이 집중돼 있다. 문제는 이런 권한이 정책생태계에 대한 몰이해로 제대로 발휘되지 않거나 그릇된 결정이 이뤄질 경우, 오롯이 ‘대통령 리스크’ 혹은 이른바 ‘청와대(대통령실)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 정부 관계없이 5년마다 이런 리스크를 반복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대선 시기 전후로 크게 타올랐던 “커다란 기대가 커다란 실망으로 끝나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수십년째 반복”(윤홍식 인하대 교수)하는 것도 대통령의 정책관과 이해 여부에 달린 이런 메커니즘 때문이 아닐까.
이 점에서 윤 행정부는 물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조금은 무거운” 정책관과 그리고 “더욱 다원화한” 21세기 정책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다. 그 요체는 정책이 자칫 잘못 결정되거나 집행되면 국민을 큰 혼선과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며, 더불어 최종 의사결정에 앞서 당사자는 물론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논의하는 숙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기후위기와 디지털화로 상징되는 오늘의 정책 환경에서는 이런 숙의형 정책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이 과정은 어쩌면 “느린 결정”이 될 것이다. 실상 우리 정책 과정의 문제 중 하나가 지나치게 빠른 결정이다. 급변하는 변화의 시기에 빠른 대응은 매우 중요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정책 결정에서 빠름은 능사가 아니다. 기록적인 폭우로 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뒤 서울시와 정부가 내놓은 ‘반지하 주택 침수 대책’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반지하에 살던 가족 세 사람이 지난 8일 숨지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참사 이틀 뒤인 10일 “지하, 반지하를 주거 목적으로 짓는 것을 금지하고 20년 안에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는” 반지하 주거 금지 정책을 발표했다. 빠른 대응이었지만 또 하나의 ‘뚝딱 정책’이었다. 서울시 발표에 다수 전문가는 “반지하에 살고 싶어 사는 이는 없다”며 “면밀한 검토 없는 금지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따지고 보면 정부와 서울시는 지하와 반지하 주택의 세부 실상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전수 실태조사를 단 한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정부와 서울시는 어떤 계층의 가구 몇명이 어떤 조건에서 사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바탕 삼아 집계·분석한 수치들뿐이다.
대책을 세우려면 반지하 주택이 사람이 살 만한지 아닌지, 상습 침수지역에 있는 것은 아닌지 등 현장 상황을 살피고, 기초생활보장 수급 가구는 얼마나 되는지 등 실상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런 실태와 진단을 근거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와야 하지만, 서울시는 지난 2010년에 내놓은 대책을 재탕하고 몇가지를 덧붙여 덜컥 내놓고, 국토교통부는 소중한 생명을 잃고서야 뒤늦게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하겠다고 법석이다.
이달 17일로 출범 100일을 맞는 윤 행정부는 2027년 5월9일까지 대한민국 시민의 안전과 생명, 민생과 직결되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앞으로 4년8개월 이상 ‘윤석열의 시간’이 남아 있다. 따라서 윤 행정부의 다발성 정책 난조를 두고서 그저 보수정부의 경험 부족과 무능력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정책 실패와 혼선의 후과는 오롯이 국민이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 것이다.
정부 출범 초기 난조가 전화위복의 쓴 약이 돼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서는 윤 대통령부터 정책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필요가 있다. 더불어 대통령을 포함한 윤 행정부 정책결정자들은 구체적인 정책의제를 놓고 ‘사람들’의 의사를 듣는 정책소통을 자주 벌이길 주문한다. 대통령이 출근길에 하는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은 즉문즉답이지 정책소통이 아니다. 그리하여 “소통하는 윤석열 대통령, 일 잘하는 정부가 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길 바란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회정책 박사.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관심이 많다. 기동취재팀장, 지역편집장, 부국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특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불평등, 복지국가, 생태위기 등을 우리 시대 핵심 이슈로 의제화하고자 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goni@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7일 충북 청주시 충북대학교에서 열린 2022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박순애 당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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