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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흑인 구타한 백인 경찰 넷이 풀려나다…1992년 엘에이

등록 2022-08-04 19:25수정 2022-08-05 02:37

[나는 역사다] 로드니 킹(1965~2012)

1992년, 엘에이의 흑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사람이 죽고 상하고 가게가 불탔다. 한국계 교민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피해 본 업소 1만여곳 가운데 2800여곳이 한국 사람 업소. 교민 사회에 상처로 남았다.

로드니 킹이 원인은 아니지만 실마리를 제공했다. 1991년 3월, 로드니 킹은 과속운전을 했다. 백인 경찰들이 쫓아와 흑인 로드니 킹을 둘러싸고 집단구타를 했다. “죽기 직전까지 맞았어요. (흑인) 노예가 어떠했을지 그때 알았어요. 다른 세계에 간 것 같았죠.” 킹은 훗날 곱새겼다.

묻힐 뻔한 사건이었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두들겨 패는 일은 미국에서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영상이 나왔다. “카메라를 산 지 한달 만이었어요.” 영상을 찍은 조지 홀리데이는 회고했다. 한밤중에 시끄러워 집 밖에 나왔다 현장을 목격했다나. 영상이 공개되자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여론 때문에 재판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며, 변호사들이 재판 장소를 옮기자고 신청했다. 백인이 많이 사는 구역에서 재판이 열렸다. 배심원 열둘 가운데 백인이 열명, 흑인은 없었다. 백인 경찰 넷은 벌도 안 받고 풀려났다. 그러자 1992년 8월5일에 사건은 다시 연방법원으로 갔다. 이번에는 백인 경찰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로드니 킹은 건실한 청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과속운전을 한 것도 마약에 취해서였다. 거액의 보상금을 탔지만 사업 실패로 날렸으며,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았고, 아내며 딸이며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둘러 몇년에 한번씩 잡혀갔다. 2009년에는 권투 경기를 뛰었는데 상대 선수가 경찰 출신이었단다. <뉴욕 포스트> 같은 매체는 “킹이 경기장에서 복수했다”고 빈정댔다. 2012년에 자기 집에서 익사했다. 사건 이후 그의 삶은 언론의 ‘가십’난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킹이 사람들 입길에 오른 속사정은 그가 ‘선량한 피해자’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맞지 않아 그런 건 아닐까? 건실한 청년이었건 아니건, 그가 당한 폭력도 흑인들이 쌓아둔 분노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나?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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