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4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서울 안심소득 시범사업 출범식'에서 사업 참여 가구로 선정된 시민들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울시는 안심소득 시범사업에 참여할 500가구 선정을 완료하고, 11일부터 지급을 시작한다. 소득이 적을수록 더 많이 지원하는 하후상박(下厚上薄)형 소득보장제도인 안심소득 시범사업은 5년간 진행된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 전국팀장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불평등은 ‘필요악’이라는 게 주류 학계나 정책 영역의 기본 인식이었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경쟁을 촉진해 더 나은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 믿음에 균열이 일게 한 건 2008년 세계 금융위기였다. 대재앙의 원인을 훑어가던 이들은 불평등은 필요악이란 믿음에 의구심을 품었다. 불평등 수준은 생각보다 깊고 구조적이었으며 급기야 금융질서에 불안정성을 불러왔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이후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가 불평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노동·교육·조세·복지 등 여러 영역에 정책 권고를 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21세기 자본>을 펴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 같은 불평등 연구자들이 학계를 넘어 대중스타로까지 발돋움한 데는 불평등에 대한 각성이 꽤 폭넓게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금융위기 이후 10년 가까이 집권 세력은 보수였는데도 그랬다. ‘시늉만 했다’란 비판은 할 수 있을지언정 ‘시장만능주의’에 가까운 신념을 보였던 과거의 보수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공정사회’ ‘경제민주화’라는 정치적 구호만 내거는 데서 그친 게 아니라 일감 몰아주기 규제(2014년 공정거래법 사익편취 금지 규정 도입)나 유통업체의 갑질 규제(2011년 대규모유통업법 제정)와 같은 시장규율 강화, 기초연금 확대와 큰 폭의 최저임금 인상 등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크든 작든 ‘불평등’을 염두에 둔 정책들이다. 심지어 과세자료를 활용해 근로소득자의 소득집중도를 살핀 연구도 아이러니하게도 한동안 한 보수 경제학자의 몫이었다.
뭇매를 맞으며 폄훼된 문재인 정부 초반기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패키지도, 금융위기 이후 점진적으로 진화해온 불평등 해소 정책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었다. 세금 징수와 재정지출을 매개로 한 재분배(2차 분배) 영역에 견줘 1차 분배 영역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높은 최저임금 인상에 과도하게 정책역량을 소모하는 바람에 고용 감소라는 부작용 시비를 낳은 점은 아쉽지만 방향과 강도를 다듬었다면 얼마든지 그 이후 정부가 이어갈 만한 정책 패키지였다.
구체적으로 중장기적 시계에서 최저임금은 전체 임금 상승률보다 조금 높은 선에서 지속해서 끌어올리고,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모두 키워 재정의 재분배 기능을 확대하고, 전달체계의 효율성을 높여 가성비 높은 복지체계를 구축하는 건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정권을 잡든 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민주당의 재집권 실패도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자산불평등 확대에 적절한 대응을 못 한 데 따른 민심 이반이 크게 작용했다.
문제는 정권의 색깔을 떠나 10년 넘게 지속된 불평등에 관한 관심과 정책 제안이 새 정부 들어선 뚝 떨어졌다는 점이다. ‘시장자유’나 ‘불법 엄단’과 같은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경제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풀지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 출범 두달이 넘도록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는 비어 있고, 불평등 해소 정책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경제부처는 인플레이션 잡기에 바빠 그런지 별 움직임이 없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주목할 만한 움직임도 있었다. 2주 전 서울시가 안심소득 사회실험에 들어간다는 발표였다. 안심소득은 소득이나 자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두에게 정액을 주는 기본소득에 견줘, 더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이면서도 두텁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을 보듬어 안는 포용정책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큰 정책이다. 국내에선 기이할 정도로 진보진영이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하며 눈길을 잘 주지 않지만, 얼마든지 토론하고 실험해볼 여지가 있다. 민선 8기 시정철학으로 ‘약자와의 동행’을 내건 오세훈 서울시장의 실험이 불평등 정책 대응의 맥을 다시 이어가는 썩 괜찮은 정책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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