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가 아니라, 관심이 필요하다. 상대를 인정해야 협상을 시작할 수 있고, 문제를 인정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남북관계의 악화는 군사 분야의 미-중 경쟁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것이다. 적대적 무시의 미래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을 만나 “대화의 문은 열어두되 북한의 도발에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단호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통일부가 전했다. 통일부 제공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이 길을 잃었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 군사적 해결은 어렵고, 봉쇄는 북·중·러 협력으로 제한적이다. 관여를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하면, 결국 남은 것은 무시뿐이다. 새로운 정책이 아니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바로 무시 정책이다. 처음에는 북한이 협상에 성의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자는 ‘선의의 무시’로 시작했지만, 결국 북한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적대적 무시’로 흘러갔다.
인내나 무시는 정책의 의도가 아니었다. 마땅한 대책이 없고, 해결의 의지도 없고, 그러다 시간이 흘러 만들어진 결과다.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말을 하지만, 무관심이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바이든 정부는 2021년 4월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아무것도 안 하는 정책’과 트럼프 정부의 ‘뭐라도 하겠다는 정책’의 중간을 추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략경쟁을 앞세우면서 대북정책이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관심이 줄어들면서, 결국 무시라는 종점에 도착했다.
‘선의의 무시’라는 말이 있지만, 무시는 선의일 리 없다. 무시는 불신의 신호이고, 서로 군사력 강화로 이어지고, 그만큼 대화의 여지는 줄어든다. 언제나 무시는 대화의 환경이 아니라, 적대의 불씨다. 북한도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결렬 직후 무시로 돌아섰다. 북한은 미-중 전략경쟁에서 중국의 편에 서고, 미국에 대해서는 협상의 문턱을 높이고, 핵무기의 양을 늘렸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은 대남관계를 선의의 무시에서 적대적 무시로 전환했다. 한반도는 적대적 무시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악순환 국면에 접어들었다.
무시로 얻을 것은 없다. 무시의 결정적 약점은 시간에 대한 오판이다. 아프간의 탈레반도 러시아의 푸틴도 “미국은 시계를 가졌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졌다”는 입장이다. 권위주의 정부의 시간 개념은 선거를 치르는 민주주의 국가와 다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제재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반대로 북한·중국·러시아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하면서, 뒷배가 든든해졌다. 북방 삼각 협력이 늘어나면, 그만큼 제재의 효과는 줄어든다.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발사해도 제재를 추가하기 어렵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의 모든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북한에 대한 제재가 최대라는 점이다. 제재는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인도적 위기를 일으키지만, 해당 지도부가 정책을 전환할 만큼의 효과는 없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제재는 인도적 위기의 문턱을 넘지 않는다.
무시하면 반드시 정세가 악화한다. 과거 ‘전략적 인내’를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결과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북한의 핵능력은 꾸준히 증가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성공한 정책’은 없다. 다만 협상할 때와 무시할 때, 북한 핵능력의 속도는 확실히 다르다. 북한은 과거 무시의 국면 동안 ‘사실상의 핵 보유’ 입구까지 질주했다. 다시 ‘전략이 없는 무관심’으로 방관하면, 당연히 핵 보유의 선을 넘어 달려가는 북한을 지켜볼 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협상의 시간이 아니다. 대화의 환경은 서로 노력해야지, 일방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북한이 대남관계를 적대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전선을 강화하면서, 정부 차원의 대화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관계 악화를 조장할 필요는 없다. ‘북한 문제’를 국내정치적으로 활용할 때도 아니다. 북한에 비판적인 여론이 높지만, 동시에 국민 다수는 정부의 정세관리 능력을 중시한다. 언제나 ‘북풍’이 통하지 않은 이유다. 해결이 어려울 때는 정세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경제위기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는 경제위기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적대적 무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 지혜를 구하고 국민적 합의를 모으며,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무시가 아니라, 관심이 필요하다. 상대를 인정해야 협상을 시작할 수 있고, 문제를 인정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상대의 변화를 기다릴 필요가 있지만, 정세관리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이제 분단의 경계는 남북한만 가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가른다. 남북관계의 악화는 군사 분야의 미-중 경쟁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것이다. 적대적 무시의 미래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실패의 반복,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