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계화는 이제 시작이다. 공급망의 분리 과정에서, 미·중 이익의 충돌 사이에서, 과잉투자와 수요한계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전략이 없으면, 다른 사람 전략의 일부가 된다.’ 전략의 핵심은 공급망의 예측 불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맨 왼쪽)이 윤석열 대통령(왼쪽 둘째)과 2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왼쪽 셋째)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못 하나가 없어서 말편자를 잃고, 말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고, 그래서 제국이 망했다.”
2021년 2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한 말이다. 반도체는 부품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편리함을, 4차 산업혁명의 성패를, 기술패권의 향방을 결정한다.
반도체는 그동안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설계는 미국과 유럽이 맡고, 제조와 조립은 대만과 한국이 맡았다. 중국은 후방산업의 생산과 거대한 소비 시장이었다. 비교우위에 입각한 상호의존으로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는 ‘생산의 세계화’로 반도체 산업이 여기까지 왔다. 지금부터는 다르다. 세계화의 시대가 끝났다.
그런데 인공지능, 5G,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 디지털 혁명의 가속화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반도체 대란이 발생했고, 마침내 미국과 유럽 자동차 공장이 반도체가 없어서 가동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삼성 반도체 공장을 처음으로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수요가 폭발했는데, 공급망은 분리되고 있다. 미국은 수출규제로 중국의 대표적인 정보통신기업인 화웨이에 미국 기업의 반도체 공급을 막았다. 나아가 재수출 금지 조항으로 미국산 부품과 기술이 일정 수준 포함된 다른 나라의 반도체 공급도 막았다. 또한 미국은 반도체 기술경쟁력의 핵심 장비인 네덜란드 기업의 노광장비 공급을 막으면서, 중국 반도체의 미래를 봉쇄했다.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고, 기술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국내에 완결적인 산업생태계를 갖추려고 한다. 미국 기업의 생산능력을 늘리고,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을 유치했다. 탈세계화 안갯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 재편에 참여해야 하지만, 이익 조화는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블록 내부의 분업과 협력이 늘어나지만, 동시에 블록 내부의 수주와 기술 경쟁도 불가피하다.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사실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제재로 일본 반도체 산업이 몰락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탈세계화는 이제 시작이다. 공급망의 분리 과정에서, 미·중 이익의 충돌 사이에서, 과잉투자와 수요한계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전략이 없으면, 다른 사람 전략의 일부가 된다.’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반도체 산업에 통하지 않는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대만, 일본 모두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전략의 핵심은 할 수 있는 만큼 공급망의 예측 불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공급망 위기는 당분간 지속되고, 러시아가 반도체 핵심 원료를 무기화하면서, 엎친 데 덮쳤다. 경쟁 국가인 대만은 소재, 부품, 장비의 수입의존도를 낮추고 가능한 한 공급망의 현지화와 국산화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도 2019년 일본이 반도체의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했을 때,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이 합심해서 불화수소를 비롯한 핵심 소재의 국산화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 위기의 선물인 소재, 부품, 장비 관련 기업 간 협력을 이제는 제도화할 때다.
그러나 구호는 난무하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산·학·연 협력,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은 얼마나 오래된 구호인가? 언제나 현장으로 내려가 답을 찾아야 한다. 현재 공급망 혼란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자, 대기업은 원가 인상 부담을 하청업체에 전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납품단가의 현실화를 요구하는 중소기업의 아우성이 넘친다. 국회가 이번에는 납품단가 연동제를 반드시 법제화하기를 바란다. 여러 기술적인 문제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의 이익 보호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반도체, 특히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경우 전형적인 하도급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급망 위기로 생산단가가 올랐는데, 비용 상승을 원청기업이 반영해 주지 않으면, 결국 중소기업의 혁신기반은 무너진다.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인 메모리반도체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정한 경쟁무대인 시스템반도체를 향해 나아갈 때다.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교육개혁으로 지속가능한 산·학·연 협력을 실천할 때다.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하는 혁신생태계 없이, 어떻게 탈세계화라는 먼 길을 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