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시간 수준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늘 그 노동시간을 더 늘릴 수 있는 조치를 준비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 노동정책의 기조라면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2020년 1월7일 새벽 4시 서울 구로구 거리공원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한 6411번 버스 첫차가 강남 쪽 일터로 향하는 시민들로 가득 차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고위관리직이나 경영진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가끔 주어진다. 강의 제목에 ‘노동’이나 ‘인권’ 등의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수강하는 이들이나 강사가 모두 팽팽한 긴장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강의의 눈높이를 최대한 낮추고 시작한다. 며칠 전, 그런 자리에서 화장실 귀퉁이의 빈 공간을 휴게실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청소 노동자의 사정을 설명했을 때, 강의를 듣던 한 분이 문제를 제기했다.
“너무 오래전 얘기를 하시는 거 아닙니까? 요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얼마나 많이 개선됐는데 그런 얘기를 하십니까? 몇개월짜리 비정규직을 채용하면서도 휴게실을 만들어줘야 하는 상황인데, 10년도 훨씬 더 지난 옛날 얘기를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청소하시던 분들이 환기가 잘되지 않는 휴게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이 작년과 2019년입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에요. 초·중·고등학교는 그동안 학비노조와 공무직노조가 열심히 활동해서 그나마 개선이 좀 됐는지 모르지만 아직 열악한 곳이 많습니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만나시는 분들이 주로 고위직이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어서 현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은 보태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평소의 신념인데, 강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노회찬재단과 <한겨레>가 함께 ‘6411의 목소리’ 기획 연재를 시작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그 기획에 지금까지 타투(문신)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주얼리(귀금속 세공) 노동자와 방송사 작가들이 보석처럼 소중한 글들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정작 고 노회찬님이 당대표 수락 연설을 하면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64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새벽에 출근하는 빌딩 청소 노동자들의 글을 아직 받지 못했다. 자신의 생활을 선뜻 글로 써줄 수 있는 분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0년 전 얘기가 아니라 지금 얘기다.
정부 여당의 고위직 인사들이 ‘주 최대 노동 52시간제’에 대한 반발이 있다고 여러차례 내비쳤다. 잔업수당 등으로 추가 소득을 얻고 있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주 52시간 이상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는 취지이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기본급만으로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임금 수준이라면 무리한 초과 노동을 할 사람은 없다. 혹 과도한 욕심으로 자신의 몸을 상할 만큼 연장 노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법으로 규제해 막아야 한다. 그래서 법정 노동시간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시간 수준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늘 그 노동시간을 더 늘릴 수 있는 조치를 준비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 노동정책의 기조라면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울리스좌’라고 불리는 동영상이 천몇백만이나 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놀이기구 안내 일을 4년 동안 하며 수없이 되풀이했을 안내말을 마치 기계가 자동으로 말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한다고 해서 ‘영혼 없는’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이다. 강한 중독성을 갖고 있어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그 동영상에 대해 수많은 언론 매체가 앞다퉈 보도했지만 4년 동안 일하면서도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상황에 대해 살펴보는 언론은 한동안 없었다. 뒤늦게 그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나왔으나, 회사는 법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노동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고용 형태를 취한 것이니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 경영자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입장이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 것이다. 퇴직 뒤 일정 기간 공백을 두고 재입사를 반복하는 이른바 ‘쪼개기 계약’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한번 물어보자. 낮은 임금을 받고 연장 노동을 하겠는가? 아니면 높은 임금을 받고 기본 노동만 하겠는가? ‘쪼개기 계약’을 반복하는 기간제 노동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 노동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노동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한 미래 지향적 노동정책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