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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의 저널리즘책무실] 대통령 부인의 ’씨-여사’ 논쟁에 대하여

등록 2022-05-11 17:54수정 2022-05-11 18:19

권태호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3주 전 말씀드렸던 것처럼 새 정부 출범을 맞아 대통령 부인의 ’씨-여사 논쟁’에 대한 설명을 드립니다.

<한겨레>는 1988년 창간 때부터 대통령 부인들을 모두 ’000 대통령 부인 000씨’라고 표기해 오다, 2017년 8월 이를 ’여사’로 바꾸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을 ’각하’라 부르던 시절, 영부인을 ’씨’라고 부른 건 상당한 파격이었습니다. 권위주의 배격, 남녀 호칭 구분 배제 등의 표기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2007년 10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에서 ’권양숙씨’라는 표기에 독자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당시 박찬수 정치부장이 ’편집국에서’라는 칼럼(“권양숙씨가 뭡니까?”)을 통해 ’씨’ 표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권양숙씨’ 논란은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보도 과정에서 또 한차례 논란이 됐고, <한겨레>는 짧은 안내문을 붙여 2007년 칼럼을 온라인에 다시 한 번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씨-여사 논쟁’이 분출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이명박 대통령 부인에겐 ’김윤옥 여사’, 문재인 대통령 부인에겐 ’김정숙씨’라 한다는 항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도 해명 했습니다만, ‘연합뉴스’ 기사를 인용 게재했거나 교열부를 거치지 않는 온라인 기사에서 ’실수’로 ’여사’ 표기가 된 경우였습니다. 당시 한겨레에 대한 일부 독자들의 불만이 ’씨-여사 논쟁’에 모아졌을 뿐, 본질은 ’씨-여사 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때도 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태스크포스팀을 꾸리고 내부 토의, 외부 좌담회, 독자 설문조사 등을 거쳐 대통령 부인 호칭을 29년 만에 바꿨습니다. 사고(대통령 부인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꿉니다)에는 변경 이유로 △독자들과 대립하고 불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언어 습관 변화 반영 등을 들었습니다. 사내 안팎에서 ’독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원칙을 저버렸다’는 상반된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5년이 흘러 새 대통령을 맞은 지금 다시 보니, ’독자들이 원하면, 언어 습관이 변하면 또 바꾸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론에서 호칭이란 현실언어 반영 외에 선도적인 측면도 있다. 각 언론사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어떤 신문은 ’씨’, 어떤 신문은 ’여사’라고 다양하게 쓰면 좋을 것 같다”면서도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바꾼 상태에선 당분간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본다.”

‘씨’는 원래 존칭이었으나, 요즘 윗사람을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부인을 높여 부르는 ’여사’도 요즘엔 청소나 요양보호를 하는 나이든 여성분을 부를 때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원래 일반명사였던 ‘여사’가 대통령 부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뜻이 확장되고 있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미국에서도 질 바이든 여사에 대한 호칭 논란이 있었습니다. 미 언론은 대통령 부인을 대개 ‘퍼스트레이디’, ’씨’(Mrs.)라고 표기하나, 질 바이든에 대해선 ’퍼스트레이디 닥터(Dr.) 바이든’이라고 합니다. 2007년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질 바이든은 ‘박사’로 불러주길 원합니다. 백악관에 들어간 뒤에도 그는 노던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NOVA)에서 영어 수업을 진행합니다. 그의 ’박사’ 호칭에는 여성들이 공부하고 일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2020년 12월 바이든 취임 직전, <월스트리트 저널>에 “질 바이든 ‘박사’는 우스꽝스럽다”는 기고가 실렸습니다. 그가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박사’가 아닌, ’퍼스트레이디’여서인데 왜 ’박사’를 고집하느냐는 논리입니다. 이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 변호사, 미셸 오바마 전 대통령 부인 등이 강하게 반박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조목조목 반박한 칼럼을 홈페이지 메인에 실었습니다.

2021년 8월 &lt;보그&gt; 표지에 등장한 질 바이든 여사. 백악관 발코니에서 포즈를 잡았다. ‘우리 모두의 퍼스트레이디, 닥터 질 바이든’이라고 표기돼 있다. &lt;보그&gt; 페이스북 캡처
2021년 8월 <보그> 표지에 등장한 질 바이든 여사. 백악관 발코니에서 포즈를 잡았다. ‘우리 모두의 퍼스트레이디, 닥터 질 바이든’이라고 표기돼 있다. <보그> 페이스북 캡처

대통령 부인 호칭을 돌아보며 언론의 호칭 차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의 코멘트를 받을 때, 늘 현직을 체크합니다. 현직이 없으면 전직이라도 찾습니다. 기사에 인용할 때는 조금이라도 더 높아보이는 호칭을 붙입니다. 2010년 친이-친박 격돌 당시,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 브리핑에서 ‘고의로’ (박근혜 전 대표가 아닌) “박근혜 의원”이라고 칭하자, 친박계 의원들이 ’도발’이라며 거세게 항의할 정도로 한국에서 호칭은 예민한 문제입니다. 언론은 일반시민에게만 ‘씨’를 붙였습니다. 호칭에 위계가 반영돼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또 언어습관이 변해 그땐 ‘대통령 000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그런 날이 올까요.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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