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서서히 점령하는 경련과 통증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져서 온갖 못난 생각을 하게 마련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며칠 앓았다.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심하게 체한 것이다. 주말 동안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집안 행사도 있었는데 하지도 가지도 못했다. 위장병을 여러번 겪은 사람들은 곧 닥쳐올 통증의 기미를 잘 알아서 나름 이런저런 조치를 할 것이다. 나도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약들을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손가락을 (스스로) 따고 당장 금식을 했지만 어림없었다. 몸을 서서히 점령하는 경련과 통증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져서 온갖 못난 생각을 하게 마련인데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야 마는 나 자신을 탓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하나가 잘못되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일정인데 왜 컨디션 조절을 못했을까. 하지만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 몇년 동안 내가 마음의 문제에 있어 노력했던 건 바로 그런 내면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탓하다가도 그만해, 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집 안의 식물들은 눈부신 오월을 맞아 무럭무럭 자랐다. 아프기 전 나가본 공원에도 나무들이 이미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어느 나무에서 날아온 것인지 꽃가루가 한낮의 공기 중을 떠다니고 수변의 나무들이 한껏 기울어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나뭇가지를 늘어뜨린 순간, 나는 혼자 나간 산책길이 꿈결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매번 되풀이되는 이 아름다움은 어떤 힘의 결과일까. 종교를 믿지 않는 나조차도 만약 창조자가 없다면 무엇이 대체 이런 질서를 가능케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 집 고드세피아(학명은 드라세나 수르쿨로사)는 지난달부터 새로운 자기 계획을 실천 중이다. 바로 높이를 갱신하는 것. 고드세피아는 마치 대나무처럼 생긴 줄기를 쭉 뻗어 올리는데 봄부터 새순이 올라오더니 그대로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집에 온 삼년 동안 한결같은 높이를 유지했던 터라 변화는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쟤 좀 봐. 이상하게 갑자기 저만큼 커버렸네.”
나는 집을 찾은 가족들에게 그렇게 한탄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달랐다. “와, 정말 높이 자라네” 하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였다. 우리 집에 저렇게 높은 곳을 노리는 녀석이 있다는 걸 조금은 자랑하고 싶었달까. 내가 앓는 사이 고드세피아는 자기가 원하는 높이까지 올라간 다음, 이쯤이면 됐다 싶었는지 상승을 멈추고 잎 낼 준비를 했다. 옆에 서보니 내 키보다 약간 높았다. 그러면 1미터 70센티미터에 달하는 길이였다. 삼년 동안 에너지를 응축해놓았다가 됐다 싶었을 때 줄기를 최대로 뻗어 올린 것이었다.
이렇듯 식물들의 계획에는 좀처럼 오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결심하고 어느 날 실행해 원하는 선까지 밀어붙이고 멈춘다. 나는 그런 고드세피아를 경애의 눈길로 올려다보다가 깨달았는데,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고드세피아는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독특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꽃을 피운다. 왕관 같기도 하고 우주의 어느 행성 같기도 한 하얗고 섬세한 꽃이다. 올해는 꽃을 내며 봄을 자축하는 것보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공중으로 더 올라가보기를 선택한 것일까.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밥을 먹은 날, 창밖을 보니 이팝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밥알처럼 소복하게 가지 위에 얹어져 있었다. 아파트 저층에 사는 것의 가장 큰 이점은 나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지난해에도 바람에 저렇게 출렁이는 이팝나무 가지를 보며 원고를 썼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비슷한 즈음에 무려 삼일을 굶어야 할 만큼 속병을 앓았었다는 사실도.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철길 양 옆으로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 전주/연합뉴스
사실 내가 며칠 앓은 일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그저 흔한 리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심상하게 넘어가지 않는 것은 내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마음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간 심리 상담을 받고 그 기간만큼 마음에 대해 절박하게 생각해야 했던 나는 이제 그런 마음의 형태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불안은 불안대로 남고 비난과 훼손의 충동도 그것대로 남는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듯 일어나는 것과 그 속으로 풍덩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발생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물론 나쁜 상태는 거부할 수 없이 아주 선명하고 힘 있게 우리를 포박하려 들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마음의 힘 또한 노력할수록 강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자연과 최대한 가까이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물은 자기 상태에 대한 미움이나 비난이 없다. 그리고 본래의 자연스러운 마음은 그런 식물의 형태이지 지금 나를 옥죄어오는 이 나쁜 형태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그 사실을 한번 더 환기하기 위해 앓는 봄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