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를 버린 것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보면 공기통을 메고 호흡기를 달고 오리발을 끼고 다니는 내가 비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로소 인간이 주인이 아닌 곳에 왔음을 실감했다. 노란 줄무늬 물고기가 내 눈 바로 앞까지 와서 맹렬히 쳐다본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다. 맙소사, 물고기에도 표정이 있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친구가 프리다이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대왕고래와 함께 수영하는 거거든요, 프리다이빙을 하면 가능하대요. 살짝 흥분과 설렘이 묻어나는 얼굴이 쌩쌩하고 빛난다. 내일이라도 태평양 어느 바다에서 대왕고래와 나란히 유영하는 룩이 떠오를 정도다. 그다음 주에 룩이 사진을 보내왔다. 잠수훈련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물속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공기통을 메고 납을 달고 오리발을 끼고 호흡기를 하고 수심 20m까지 내려가기까지는 많은 훈련과 비용이 필요하다. 능수능란하게 수영을 잘하지도, 바다에서 노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스킨스쿠버를 시작한 건, 사람이 주인이 아닌 곳, 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일하러 집 밖으로 나가면 숨이 잘 안 쉬어져서 쭈그리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곤 했다. 20대 중반이었고 20세기 말이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나날이 문명은 번성했고 나는 조선시대 왕보다 잘 먹었으며 원하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썩기 직전의 사과에서 나는, 최고로 달콤한 향이 시나브로 콧속을 가득 채웠다. 인간종이 다다를 수 있는 임계치, 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무들은 무참하게 베어졌고 야생의 동물들은 포획되었으며 다섯걸음마다 하나씩 치킨집이 자리했다. 저 수많은 닭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세상의 주인은 마음껏 인간이었다. 그 서슬 푸른 오만함에, 그 끈끈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주인이 아닌 곳, 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깊은 수심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다 밑은. 수영장에서의 훈련을 끝내고 ‘오픈 워터’를 하기 위해 속초로 갔다. 첫 잠수를 그렇게 불렀다. 날이 흐렸고 빗방울도 떨어졌지만 선생님도, 함께 간 경력자들도 개의치 않았다. 스킨스쿠버는 버디로 진행한다. 철저하게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인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다.
황량했다. 빛이 들지 않는 바다 밑은 황폐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라고 느낀 건 정신을 차리고 나서다. 처음 들어가 보는 바다 밑에서 나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허우적거렸다. 후욱 후우욱, 내 숨소리가 우주의 전부인 것처럼 밀려들려왔다. 이토록 생생한 호흡이라니, 나는 오직 숨이었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선생님이었다. 몸이 비로소 평형을 이루며 오리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선생님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괜찮냐는 수신호를 보냈다. 물풀들만 흔들렸다. 미역다발 같은 해초들이 무리지어 머리를 풀고 춤을 추는 바닷속은 낯선 행성 같았다. 선생님은 이것저것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첫 잠수는 그렇게 끝났다. 정신은 없었지만 강렬했다. 새로운 우주였다. 모오든 익숙함 따위 한번에 와장창 부서져 내리는.
그해 여름 제주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하루에 한번 잠수를 했다. 해안 다이빙도 하고 보트 다이빙도 했다. 몸이 편안해지자 비로소 바다 밑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놀라웠다. 멸치들이 떼를 이루어 군무를 추듯 움직이고 다양한 물고기들이 날렵하게 오갔다. 설악산에 그대로 물을 부어놓은 듯한 지형이 있는가 하면 산호 군락이 화려하게 자리를 잡은 곳도 있었다. 정면을 보며 헤엄치다가 몸을 뒤집으면 햇빛이 환하게 수면에 비쳤다. 황홀해서 가슴이 뛰었다. 몇천만년 동안 물풀들이 해안에 가닿으려고 노력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아가미를 버린 것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보면 공기통을 메고 호흡기를 달고 오리발을 끼고 다니는 내가 비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로소 인간이 주인이 아닌 곳에 왔음을 실감했다. 노란 줄무늬 물고기가 내 눈 바로 앞까지 와서 맹렬히 쳐다본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다. 맙소사, 물고기에도 표정이 있다.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물고기가 있고 째려보며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다.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 물고기는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거칠 것 없이,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는 없으리라. 눈만 내놓고 동태를 살피는 녀석들도 수두룩하다. 보이는 것의 만배쯤 되는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도 감지된다.
그들이 주인이고 나는 객이었다. 그 느낌은 분명하고도 선연했다. 그들의 세계에 잠시 떠돌 뿐, 결코 장악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비늘도 없는 남루한 존재여서 마음이 온순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단아해졌다. 재빠르고 능동적이고 기민한 것들 사이에서 느리고 둔하고 멀뚱거려졌다. 한심해서, 개운했다. 바다에서 올라와 납을 벗고 다이빙슈트를 벗으면 몸도 가벼웠지만 어쩐지 속이 구만리장천으로 통쾌했다. 쭉 뻗은 두 다리가 새삼스러웠다. 그 뒤로도 몇년 발리나 푸껫의 바다 밑을 떠다녔다. 인간이 주인이 아닌 곳, 에서 인간은, 아름다웠다.
모오든 생명의 얼굴은 풍부하고 다채롭고 경이롭다. 다른 종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매클린톡은 옥수수의 표정을 읽어 노벨상을 받았고, 호프 자런은 나무의 표정을 살펴 <랩걸>이라는 멋진 책을 썼다. 최재천은 개미의 표정을 확대해 우리를 그들의 세계로 안내하고, 김상욱은 원자의 표정을 읽어 우주의 떨림과 울림을 공명하게 한다.
멸치에게도 표정이 있어요, 내 말에 그가 으하하하하하 웃었다. 정말이라니까요, 더 크게 으하하하하하 웃었다. 그래도 내일 밥상 위에 올라온 멸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볼 것이다, 그는.
*어스십(Earth-ship)은 ‘지구’라는 뜻의 영어 ‘Earth’와 ‘관계’라는 뜻의 영어 ‘relationship’을 합쳐 만든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고 무엇보다 태양에너지의 자장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는 말입니다. 달과 바다와 강과 나무와 꽃과 바람과 나비와 새와 고래와 개미와 함께 살고 있다는 자각이 절실한 때라 여겨집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 가치를 다변화하는 것, 어스십을 통해 익히고자 하는 감수성입니다. 예전에는 저절로 익혀지던 어스십이 요즘은 공부해 얻어야 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우리는 흙에 발을 딛고 바닷속을 헤엄치며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사는 이웃들의 다양한 표정을 곰곰이 살펴볼 작정으로 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