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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팬데믹 이후…확진자·완치자·사망자, 숫자 너머의 인간을 상상하자

등록 2022-04-25 04:59수정 2022-04-26 09:04

기고 l 김탁환 소설가
팬데믹 이후 일상회복. 일러스트 김대중 작가
팬데믹 이후 일상회복. 일러스트 김대중 작가

코로나19의 문제는 인간 조건의 문제다. 2020년 3월 본격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된 후, 나는 신영복이 언급한 ‘여름 징역살이’를 종종 떠올렸다. 여름 감옥에서 옆 사람을 증오하는 까닭은 그가 36.5도의 열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면 그토록 싫던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 코로나19가 지나간 뒤엔 우리도 그러할까.

돌이켜 생각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2022년 4월23일에도 6만4725명이 새로 확진되었고 109명이 사망했다. 성급한 반성보다는 2년 넘게 창궐한 감염병 근절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어쨌든 끝은 올 것이다. 대미를 장식할 문장은 그때 가서 찾아보기로 하고, 세상을 뒤흔든 바이러스의 기운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시절을 읽어보고 싶다. 지구 전체가 감염병으로 들끓기 직전의 감촉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다음에 올 감염병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싶은 욕망이겠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로 이어지는 감염병 6년 주기설을 믿진 않더라도, 신종 감염병의 발생 주기는 놀랄 만큼 짧아졌다. 2020년대에 또 다른 감염병을 목도할 가능성도 있다. 나는 메르스 사태를 다룬 사회파 장편소설 <살아야겠다>를 2018년에 출간했다. 2015년 5월에 들이닥친 메르스로 인해 국내에서 186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38명이 사망했다. 소설을 쓰기 전 유가족과 완치자를 수소문하여 만났다.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다른 재난 피해자들과는 달리 메르스 피해자들은 모임을 꾸리거나 조직을 갖추지 못했다. 인적사항을 숨긴 인터뷰조차도 꺼리고 힘겨워했다. 또 하나는 완치 판정을 받은 뒤에도 후유증 때문에 직장 복귀가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감염병 때문에 추락한 이들을 떠받칠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했다. 그들의 참혹한 경험을 듣는 동안, 감염병에 걸린 까닭을 개인의 실수나 잘못, 나아가 신의 형벌로 간주하던 옛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두려움을 차별과 혐오로 바꾸는 낡은 편견들을 부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피해자들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억울함을 가감 없이 드러낼 판이 필요했다. 몇몇은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으로도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코로나19와 함께 새롭게 부각된 단어는 팬데믹이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 맞서면서 개선된 점은 무엇이고 고쳐지지 않은 점은 무엇일까. 세계가 인정한 방역모범국, ‘K-방역’에 열광하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몇가지만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질병관리청의 적극적이고 투명한 정보공개에 주목하고 싶다. 메르스 발병 초기엔 환자들이 다녀간 병원 이름까지도 한동안 공개하지 않아 혼란을 자초했었다. 감염 경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솜씨 또한 출중했다. 그러나 생태학자 김종철도 지적했듯이, 확진자 동선 확인에 활용된 CCTV와 신용카드 등의 전자기술이 통제와 감시의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도 이제는 짚어야 한다.

감염병이 찾아들 때마다 반복되는 문제도 있는데, 나는 그 원인을 상상력의 부재로 본다. 코로나19가 휩쓴 세상을 다룬 정혜윤의 에세이집 <앞으로 올 사랑>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원용하여 틀을 짰고,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이 슬픈 세상에서 우리가 꼭 나눠야 하는,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기쁜 말은 무엇인지 묻는다. 상상을 거듭해도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감염병은 ‘코로나 블루’란 단어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참매처럼 날아오르고 두더지처럼 파고드는 자유로운 상상도 막아버렸다. 상처 주는 말들만 주고받으며,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꼴이다.

우선 우리는 숫자 너머의 인간을 상상해야 한다. 확진자와 완치자 그리고 사망자의 증감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숫자 너머의 인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숫자로 치환한 채 넘겨도 상관없는 죽음은 없다.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 더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 방역 수칙에 따라 화장할 시신들로 간주하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행복하고자 애쓴 사람들을 상상해내자.

이런 상상은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당장 생활을 위협받는 이들에게로 뻗어갈 필요가 있다. 재난이나 전쟁 같은 긴급 상황은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어떤 이들은 감염병을 피해 멀리 떠날 수 있고 몇달 혹은 몇년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떤 이들은 감염병이 코앞에 오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며 일해야 한다. 다시 말해 팬데믹에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진다. 전망이 어두울수록 나와 내 가족부터 챙기려는 마음이 커지지만, 그 순간이 바로 이웃들의 끔찍한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과 위로의 몸짓과 목소리를 낼 때이다. 그 작고 따스한 관심이 벼랑 끝까지 갔던 사람들을 살린다. 낯선 이들을 벗으로 아끼는 일상의 치유자가 되자.

또한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감염병으로 뒤덮인 세계를 회생시킬 묘책 역시 민족과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팬데믹과 함께 높아진 국경의 벽 안에 갇혀선 모두를 살리는 대안을 마련하기 힘들다. 여기서 중요한 상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야생동물 사이의 거리를 떠올리는 것이다. 사람 간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키더라도 야생의 서식지가 계속 침탈당한다면, 바이러스는 언제라도 인간 사회로 넘어와 새로운 병을 일으킬 것이다.

일상으로의 회복을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닿아야 하는 정상 생활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길은 크게 둘로 갈린다. 하나는 코로나19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미 만들고 걸었던 길을 따라 일상으로 알차게 복귀하더라도, 새롭게 다가오는 감염병을 예측하고 막기는 어렵다. 임시방편이 더 끔찍한 악순환을 낳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새판을 짜자는 입장이다. 최근에 꾸준히 논의되는 탈성장에 대한 논저들이 이 흐름을 대변한다. 더 많이 개발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시스템을 중단할 수는 없을까. 그와 같은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코로나19를 막으려고 항공 운항까지 멈출 줄 상상이나 했느냐고. 물론 초행길은 낯설고 위험하다. 나희덕의 시 ‘가능주의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유난히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써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상상이 가능하면 움직여야 한다. 전염병을 탓하며 무기력하게 기다릴 순 없다. 코로나19를 겪으며 깨달은 것들을 각자의 삶으로 녹여 나가는 것이다.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시인은 가당찮은 꿈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울 것이고, 생태 도시를 그리는 이들은 도시 텃밭을 가꾸기 위해 삼삼오오 모일 것이다. 종 다양성이 높은 습지나 숲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도 있으며, 친환경 농산물을 꾸준히 구매하여 농부들을 응원할 수도 있다. 사람의 입장만 내세우지 않고, 동물과 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의 입장까지 살핀 정책 수립도 가능하다. 대도시에서 농산어촌으로 배움터를 옮기는 가족도 있고, 인구소멸지역으로 간주된 지방의 작은 마을을 되살리고자 돌아온 젊은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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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탁환. <한겨레> 자료사진

팬데믹 이후 당신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일상의 편리함만 따지지 말고, 건강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일찍이 김종철은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 고민의 축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연이어 도착해 지구를 뒤덮은 감염병이야말로 근대의 어둠을 들여다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만인에서 만물로 삶의 조건을 바꿔, 증오를 지우고 상호부조의 정신에 기반한 품 넓은 상상과 실천을 시작할 때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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