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강원 강릉시 초당동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의 분홍색 겹벚꽃이 활짝 펴 화사한 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손석우 |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우연찮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소리꾼 장사익 특집 방송을 보게 되었다. 장사익님과 최백호님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고 있었다. 중저음으로 시작된 노래는 한 맺힌 목소리로 이어졌고 곧 아련한 듀엣으로 마무리되었다. 말 그대로 명불허전. 대학 시절 장사익 1집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전율이 떠올랐다. 첫 곡 단 두마디를 듣고 음반을 샀다.
그리고 동명의 노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됐다. 자우림의 김윤아님이 부른 ‘봄날은 간다’. 제목만 같지 전혀 다른 노래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무심히 지나가는 봄날, 작은 바람에 사라지는 봄꽃, 그리고 사람들. 당대 최고의 멜로 영화 주제곡이었다. 이 곡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 <봄날은 간다>를 찾아 봤다.
자우림, 자주색 비가 내리는 숲. 독특한 이름이다. 당시에는 이런 흥미로운 이름의 가수 혹은 밴드를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자우림이 데뷔한 이듬해, 가수 ‘비’(Rain)가 데뷔했다. 이보다 앞서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그룹이 있었다. 일기예보의 ‘좋아 좋아’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바람’이라는 그룹도 있었다. 트로트 가수로 전향한 장민호님이 리더였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봄날은 간다’를 들으며 교정을 둘러봤다. 어디로 갔을까?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 많던 꽃들이 사라져버렸다. 철쭉만이 유일했다.
봄이면 안도현님의 시 ‘3월에서 4월 사이’를 떠올리곤 한다.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보통 개나리꽃은 백목련꽃이나 조팝나무꽃보다 일찍 핀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다. 아마도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에서는 개나리꽃이 조금 늦은 모양이다. 사실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시의 단조로움 속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봄날같이 이 시가 좋다.
너무 빨리 져버린 봄꽃들.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실제 관측에서도 확인된다. 계절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30년(1912~1940년)과 최근 30년(1991~2020년)을 비교해보면, 계절의 변화는 뚜렷하다. 여름은 20일이나 길어졌고 겨울은 22일 짧아졌다. 지구온난화로 한반도 전역이 따뜻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은 어떨까. 봄과 가을이 없어지고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가을은 4일 짧아졌지만 봄은 오히려 6일가량 길어졌다.
그렇다면 봄이 짧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아무래도 여름이 빨리 오기 때문일 것이다. 봄날을 그리고 봄꽃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찾아오는 무더위. 과거에 비해 여름은 11일 가까이 일찍 시작되고 있다. 5월 말이면 이미 여름에 접어든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향성이 최근 더욱 강화되고 있다.
계절이 앞당겨지다 보니 봄꽃도 일찍 지고 있다. 그렇다고 꽃 핀 시간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여름이 일찍 시작하는 것만큼 봄도 일찍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봄꽃은 빨리 피고 있다. 정량적인 관측이 시작된 1960년대 이래, 최근 봄꽃의 개화 시기는 1~2주나 빨라졌다.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꽃이 핀 날보다 진 날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나타나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도 이렇게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