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내로남불, 그들만의 리그

등록 2022-04-19 16:22수정 2022-04-20 02:36

그 모든 내로남불의 공방은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일어난다. 교수나 의사, 고위직 공무원을 부모로 두지 못한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로맨스’고 ‘불륜’이고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월급 100만원에 세금 꼬박꼬박 내고 산다던 청소원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7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근 제기된 자녀 관련 의혹을 해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7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근 제기된 자녀 관련 의혹을 해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2017년 1월 특검 사무실로 강제 호송되던 최순실(최서원)이 “억울하다”고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리자, 그 모습을 본 청소 아주머니가 한마디 툭 던졌다. “염병하네!” 전국에 생중계된 이 소리로 ‘국민대변인’이란 별칭을 얻은 청소원 임아무개씨는 당시 정황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청소 일 하면 100만원 남짓 받는데 세금 꼬박꼬박 낸다.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나라 망하게 해놓고 되레 뻔뻔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걸 보니 못 견디겠어서 한마디 퍼부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박영수 특검은 대장동 화천대유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최순실은 이를 두고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돈벼락 잔치를 벌였다”며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다”고 호기롭게 일갈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면되어 지지자들의 뜨거운 환대 속에 귀환했고 그간 자신을 변호한 유영하 예비후보의 후원회장이 되어 “나의 못다 한 꿈을 이뤄줄 인물”이라며 정치 재개를 선언했는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그런 박근혜를 찾아가 “참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최순실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올 때 흘리고 간 검은색 프라다 신발 한 짝이 불길한 역사의 전조였을까? 머리에 꽃 꽂은 신데렐라처럼 국정농단의 주역들은 화려한 복귀를 꿈꾸고 그 입으로 ‘공정과 정의’를 외친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편입학, 병역 특혜 의혹으로 새 정부 출범 전부터 논란이 무성하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의혹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투입해 서울대·부산대 등 30여곳을 압수수색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외쳤던 윤석열 당선자가 이번에는 “부정의 팩트가 확실치 않다”며 자기편 감싸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조민씨의 입학 취소 조치가 가혹하고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정호영 자녀에 대해서도 조국 때만큼 탈탈 털어 강도 높게 수사하라”며 강경 대치 중이다. 조국에게 칼침이 되었던 내로남불의 공정성 논란은 부메랑처럼 다시 윤석열 정부를 향하고 있다.

조국 사태 당시에도 “왜 정유라 입시비리 때처럼 처리하지 않느냐?”는 비판론이 드셌다. 정유라는 1심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청담고 입학이 취소되고 이화여대에서 퇴학 조치를 당했으며 이화여대 총장과 입학처장을 비롯해서 입시에 관여한 교수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정유라-조민-정호영의 아들딸로 이어지는 입시비리 사건 때마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포지션만 바뀔 뿐, 똑같은 질타와 똑같은 반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 재생된다. 그 모든 내로남불의 공방은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일어난다. 교수나 의사, 고위직 공무원을 부모로 두지 못한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로맨스’고 ‘불륜’이고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조국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이 터졌을 때 “자식들 스펙을 위한 부모 품앗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연민을 표하던 이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다. 일부는 분개한 음성으로, 일부는 은밀히 고해성사를 하듯이 “내 자식이 다니던 학교에도 그런 일은 흔했다”며 “열심히 공부한 애들이 무슨 잘못이냐?”고 되물었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의 안정된 지위에 있는 이들이 이런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자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자신보다 더 많은 자산, 더 높은 직위를 가진 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소소하고 어설픈 지원일 뿐이라며 부모로서 자괴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편법은 늘 칼자루를 쥔 자에게 유리하고, 그래서 칼자루를 잡는 일은 그 모든 반칙을 덮을 만큼 중요하다.

특권층에게 정의는 칼자루를 잡기 위한 명분일지 모르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겐 생명과 생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수단이다. 월급 100만원에 세금 꼬박꼬박 내고 산다던 청소원 아주머니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운동장 바깥에 선 이들에게는 검수완박을 둘러싼 칼자루 잡기 싸움보다 중하고 시급한 일들이 많다.

“시민은 법을 원하며 법이 준수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경우는 이와 사뭇 다르다. 이들의 사회적 조건은 특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특권을 추구한다. 만약 이들이 법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법관 노릇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루소, <산에서 쓴 편지>, 1764)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2.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3.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4.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신년 국운’ 잘 풀릴까요? [슬기로운 기자생활] 5.

‘신년 국운’ 잘 풀릴까요? [슬기로운 기자생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